[나는 고졸사원이다 40] 백수 탈출, 스타트업에 합류하다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 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 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 구직활동 백수로써 내 하루 일과는 취업사이트부터 생활정보지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구인광고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가족회사에 취업했다가 나의 인생 철학과는 맞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하루 만에 다시 백수가 됐다. 산업기능요원 복무가 만료되고 딱 일주일만 마음 편히 쉬려고 했는데 어렵게 취직한 회사를 박차고 나오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더 오랜 시간을 쉬어야 했다. 그 휴식은 처음 일주일처럼 홀가분하고 마음이 편한 휴식은 아니었다.
자취방에서 빈둥거리며 느지막이 일어나 하루 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취업 사이트'를 뒤지는 일이었다. 그곳도 어쩌다 한 번씩 들어가야 새로운 구인광고들을 볼 수 있을 텐데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다 보니 매일 보는 구인광고들뿐이었다. 거기도 매일 같이 들여다보니 광고만 보고도 괜찮은 회사인지 열악한 회사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
괜찮은 회사들은 이직률이 낮다. 그래서 새로운 사업에 진출해 신규 인력을 모집하는 게 아니라면 구인광고가 잘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가야 빈자리가 생겨 사람을 뽑을 텐데 괜찮은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은 당연히 별로 없기 마련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런 회사들의 구인광고는 잘 나오지 않았다.
백수로 노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는 두 달 생활비도 충당이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서둘러 취업하지 않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처음엔 인터넷 취업사이트에서만 구직활동을 하다가 집 근처 생활정보지도 매일같이 가져와 구인란을 샅샅이 뒤졌다.
구미는 공단지역이라 수 많은 회사들이 있는데도 막상 구직활동을 하다 보니 마땅한 자리가 별로 없었다. 나와 함께 산업기능요원으로 함께 복무하기 위해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들도 내가 백수로 놀고 있을 때 하나 둘 복무 만료를 맞았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형과 함께 병역특례를 받으러 올라온 친구는 복무 만료가 된 후 다시 부산에 있는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학기에 복학을 했다.
다른 한 명의 친구는 내가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할 때 생산 라인 작업자로 근무하다가 내 후임 수리사로 키워준 친구였는데 복무가 만료될 때까지 2년을 꾸준히 수리사로 역량을 키워 나보다 빨리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다들 각자 자기 갈 길을 잘 찾아가고 있는데 제일 먼저 복무가 만료된 나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무척 상하기도 했다.
내가 구직활동을 하던 2005년 당시 우리나라는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대기업들은 이미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중소기업은 규모에 따라 순차적으로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취업은 하되 내 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싶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으면서 교대 근무를 하지 않는 일자리를 원했다. 그런 조건의 일자리만을 고집하면서도 급여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리를 찾다 보니 취업이 점점 늦어졌다.
총원 6명, 작은 스타트업의 창립 멤버가 되다
▲ 대기업 출입문 사원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대기업 사옥, 그중에서도 내가 근무하던 연구소는 별도의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서 출입을 할 수 있었다.
퇴직금을 받아 넣어뒀던 통장의 잔고도 슬슬 바닥이 나기 시작했을 무렵이 돼서야 나는 취업에 성공했다. 그 회사는 이제 막 신설된 회사로 대기업의 사내 협력업체였다. 보통 대기업 사내 협력업체라고 하면, 생산 공정 중에서도 노동강도가 높고 위험한 일들을 받아하거나 생산 라인에 파견 인력을 보내는 등의 회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특이하게도 연구소 소속의 업무 도급회사였다.
내가 이 회사에 취업한 이유는 주 5일 근무에 교대 근무 없이 주간 근무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근무 환경'과 '업무 분야'였다. 그 대기업에서 회사가 맡고 있는 업무는 PDP연구소 '신뢰성 센터'를 대신 운영하는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근무지가 그 대기업 연구소였고 담당 업무는 그 연구소에서 새로 개발되는 제품의 신뢰성 테스트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내가 계속 해오던 디스플레이 분야 QC(Quality Control)와 비슷했기 때문에 아주 익숙한 분야였다.
인터넷 취업 사이트에서 그 회사 구인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작성해 메일로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 역시 그 대기업의 연구소가 있는 사업장에서 진행됐는데 아직 사업을 시작하지 않은 상태라 사무실이 없어 구내식당에 앉아 면접을 봐야 했다.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총 4명이었고 우리는 모두 합격했다. 그렇게 우리 넷은 새로 창업한 신생 회사의 창립 멤버가 됐다.
우리와 마주 앉아 면접을 본 사람은 회사의 사장님이었다. 50대는 족히 돼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였다. 사장님은 이미 그 대기업의 다른 계열사에 사내 협력업체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고 그와 별개로 이번에 새로 추가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대기업의 사내 협력업체 사장 자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대기업 고위 임원 출신 정도는 돼야 일정 부분의 사업을 하나받을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 대기업의 사업장에서 나오는 쓰레기 처리 업체까지도 모두 그 회사 출신들이 하고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내가 취업한 회사의 사장님도 그 대기업 '개발 실장' 출신이었다.
다 함께 그 자리에서 '합격'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우리 1기들은 면접을 본 날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첫 출근을 하는 날도 계속됐다. 번쩍번쩍한 대기업 연구소에 출근해서 우리가 앞으로 생활할 사무실에 책상을 옮겨 놓고 청소를 했다.
그 대기업의 연구소는 드 넓은 사업장 내에 있는 건물 중에 가장 좋은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그 사업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원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와 별개로 연구소가 있는 층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별도의 보안검색대가 또 설치가 돼 있었다. 연구소 소속이 아니면 그 대기업의 직원들도 출입이 힘든 그곳을, 협력업체 직원인 우리는 매일 들락거릴 수 있었다. 그 또한 하나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점심시간에 한참을 걸어 처음으로 가본 그 대기업의 구내식당도 엄청 좋았다. 메뉴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중에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먹을 수 있었다. 식당 이외에도 이 대기업의 사업장 내에 있는 좋은 복지 인프라를 모두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내 싱글벙글했다. 잠시 '이 대기업의 직원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나도 취업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우리 1기 멤버 이외에도 과장님 한 분이 출근했다. 관리직으로 입사한 과장님은 30대 중반으로 역시 이 대기업 출신이었다. 이렇게 사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우리 1기 멤버 4명으로 구성된 작은 스타트업이 내가 산업기능요원 복무를 마치고 처음으로 '일반 사원'으로 근무한 회사였다. 그곳에서 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