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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질문의 답이 바뀌었다

by 다독임

애들이 어렸을 때 내가 가끔 우스개로 던지는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누구를 선택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끙끙 애쓰며 고민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장난 삼아 여러 번 물어봤을 것이다. 어찌 보면 아이에게 가혹했을(?) 질문을 엄마의 사적 즐거움으로 악용하다니, 지금 보면 좀 미안하기도 하다. 순진하던 아이들은 눈치가 생기고부터 엄마 앞에서는 엄마가 좋고, 아빠 앞에서는 아빠가 좋고, 엄마아빠 앞에서는 둘 다 좋다고 대답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시간이 더 지난 후에 농담 삼아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데 그때 새초롬하게 눈 흘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뒤로는 굳이 질문하지 않게 됐다. 이제 부모의 키를 훌쩍 넘어선 아이들이지만 그래도 나는 가끔 장난 삼아 묻고 싶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누가 더 좋아?"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편파적인 대답을 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항상 같은 답, 바로 "엄마가 좋아."


나의 엄마는 세련된 외모나 사회적 지위를 갖추지 않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철없던 어린 마음에는 그것이 가끔 창피하고 자랑스럽지만은 않았다. 엄마가 가사도우미로 일하러 간 집이 우리 반 남자아이의 옆집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한동안 의기소침하게 지냈다. 그러다 어린 남매가 스스로 밥을 챙겨 먹을 수 있는 나이, 기껏 초등학교 3, 4학년이 되었을 무렵에 엄마는 더 나은 밥벌이를 위해 하루 종일 나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십 년 넘게 식당 홀서빙을 하면서 고기 냄새에 푹 배인 몸으로 오빠와 나를 키웠다. 나중에는 토스트 가게를 차렸는데 쉬는 날 없이 온종일 말뚝처럼 가게를 지킨 엄마에게선 항상 마가린 냄새가 진동했다. 이렇게 평생 일만 하느라 자식 돌볼 틈 없는 삶이었지만, 그 자체가 사랑이고 헌신임을 알았기에 나는 당연히 엄마가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여전히 집밖에서 들쑥날쑥 했으니까.


그러므로 아빠가 좋았던 적은 거의 없다. 아주 어릴 적에 내 손을 잡고 계곡이나 대공원을 놀러 갔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편했을 것이다. 어쩌다 아빠에게 고마움을 느끼거나 아빠가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은 했을지언정, 단언컨대 좋다거나 소중하다는 감정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뿌리 박힌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노년의 엄마에게 야트막한 울타리가 되었으므로 그냥 잊은 척하며 지냈다.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는 어린아이가 웅크리고 있는데, 도무지 크지 못한 이 내면 아이는 여전히 아빠를 좋아하지 않는다. 겉으로만 훌쩍 자란 중년의 딸은 그저 자식의 도리를 하기 위해, 아빠와 잘 지내라는 엄마의 당부를 모른 체할 수 없어서 근근이 관계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나마 잠깐의 좋았고 고마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잘 지내보려 부단히 애썼다. 그러다 최근에 부모님 이사를 도우며 부쩍 늙은 아빠를 대하면서 불쌍하고 안쓰러운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아빠의 검사결과를 예상이나 한 것처럼.


아빠는 이제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뇌에 쌓인 베타 아밀로이드라는 나쁜 단백질은 아주 서서히 아빠의 기억을 덮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라 예상했던 알츠하이머 뇌 사진을 보고 마음이 주저앉고 말았지만 초기여서 주사치료를 할 수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도 못한, 뇌 속에 숨어 있던 작은 혈관종은 언제 어디서 나타난 걸까. 오히려 이참에 발견해서 다행이라 해야 할까. 뭔가 치료도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신경외과로 넘어가야 하는 10월의 첫날을 또 막막히 기다린다.


오랜 세월 그토록 내가 정답이라 여겼던 "엄마가 좋아"라는 답은 이제 바꾸어야 하나보다.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아"라고. 나는 이제 아빠를 그만 미워하려고 한다. 아빠가 가끔 까먹고 엉뚱한 답을 해도 그러려니 하며 짜증도 덜 내면서 지금의 아빠를 천천히 마주할 것이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새롭게 다짐한 나의 정답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잡을 것이다. 언젠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날이 온다면, 아빠와 좋았던 모든 기억들을 총동원하여 그래도 힘을 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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