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대신 책으로 밀어 넣기

일상을 건강하게 버티는 법

by 다독임

버스카드 요금 잔액이 다 되어 내 카드를 빌려간 아들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제때 충전 좀 해."


손등이 바싹 터서 아프다고 툴툴대는 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핸드크림 좀 챙겨 발라."


오늘 아침 아이들에게 한 말들이다. 평소라면 미리 챙기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답답함으로 쏟아냈을 말들인데, 어쩌다 보니 나를 향해 해야 할 말 같아 더 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하면 되지"

지극히 상식적이고 쉬운 지침들이 통하지 않는 날들이 있다. 버스 카드를 미리 충전하면 한 두 달은 편하고, 핸드크림을 챙겨 바르면 손도 보송보송하다는 이 당연한 결괏값을 알면서도 도무지 행해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아이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집에서 몇 걸음 앞의 편의점까지 걸어가기가 귀찮고, 핸드크림을 꺼내 뚜껑을 여는 것조차 귀찮다는 것. 단지 그뿐이다. 귀찮거나 혹은 하기 싫거나-로 간단히 명명되는 아이들의 단순함이 때로는 부럽다.


요즘 내가 도통 지키지 못하는 행동 지침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조금씩 먹으면 되지'


많이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 나이이므로 조금씩 먹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을 벗어나 최근에는 변칙 행동을 마구 일삼고 있다. 평소 밥 양의 1.5~2배인 것을 알면서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에 사로 잡힌다든지, 이미 배가 부르지만 헛헛함을 채우고자 간식 바구니를 뒤져 단 것을 밀어 넣는 행위 등이 있다. 밥과 빵은 별개의 것이라며 각각 한 끼 분량씩 밀어 넣기도 한다. 점심 식사를 할 때는 저녁까지 버텨야 하니 잘 먹어 둬야 해, 저녁 식사를 할 때는 이따 운동할 거니까 잘 먹어도 돼_와 같이 나만의 이유를 찾아가며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즐거움보다 죄책감이 밀려오는 이 과식과 폭식의 행위들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는데 쉽지 않았다. 간신히 뺀 살들이 다시 찔까 싶은 걱정이 밀려와도 다시 운동하고 덜 먹으면 괜찮을 거라는 자기 위안으로 마구 밀어 넣던 중, 오랜만에 위염 증상을 느꼈는데 엉뚱하게 반가웠다. 이제 멈출 수 있겠구나 싶어서.


많이 먹으면 더 아프고 힘들어질 테니 차라리 위염이 온 게 잘됐다 싶은 이 미련한 마음은 무엇인가. 소화제를 먹어도 소화되지 않고, 진통제를 먹어도 두통이 가시지 않는, 수도 없이 메슥거리는 이 불편한 통증을 나는 오히려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그러면 마음의 불편함이 통증으로 희석되어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테니.


일상의 평안과 여유를 원하면서도 그 마음이 때로는 욕심 같다. 이렇게 아무 일 없어도 괜찮을까. 지난여름, 견고하던 부모님의 세계가 조금씩 무너지는 모습을 본 이후로 매일 조금씩 불안해졌다. 다른 불행이 또 치고 올라올까 봐 잠깐의 무탈함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 차라리 일상의 가벼운 불편과 불안을 끼고 사는 게 되려 안심이 되는 이상한 의식의 흐름 속에 살고 있다. 아마도 내 안의 풀리지 않는 이야기들을, 그 답답함과 불안함을 먹는 행위로 갈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일단 먹고 보는 것일까.


상비약으로 둔 위염약을 꺼내보니 하루치 밖에 없다. 이걸 먹고도 낫지 않으면 병원에 가야 할 것이다. 약봉지를 보니 정신이 들면서, 내 몸에 무해한 '읽는 행위'로 답답한 마음과 불안들을 잠재워 보자고 정신을 차려본다. 음식을 먹지 않고 글자들을 꾸역꾸역 내 안으로 밀어 넣는 행위는 체함도 없고 부대낌도 없을 것이다. 문장들을 삼키는 시간들은 위로가 되고 안도가 될 것이다. 더디고 미적지근하더라도 폭식보다는 아무렴 낫겠지.


아무튼 안 먹어도 불편하고 먹어도 불편하다면 안 먹는 게 맞을 텐데, 이 쉽고 명료한 지침을 도무지 행하기 어렵다. 또 하나, 글을 써야지 하면서도 쓰지 못하고 미루기를 2주쯤 되었나 보다. 마침내 오늘 아침 브런치의 [글 발행안내] 권면 알림을 받고서야 슬그머니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글을 쓰는 행위가 부디 속 시원한 소화제가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너무 민감하고 개인적이고 흐릿해서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끔은 큰 소리로 말해 보려 노력해보기도 하지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던 그것을, 다른 이의 귀에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적어서 보여 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일지라도. 말이 전하기에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멀고도 가까운_ 레베카 솔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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