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합니다♡
내가 아침마다 출근하는 곳은 초등학교 학습준비물실이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학습 물품들을 대여하고 관리하며 선생님들의 간단한 업무들을 보조한다. 매일 3시간씩 근무하는 파트타임이어서 직업이라 할 수는 없고. 퇴직금이나 복지혜택은 없으나 세금 하나 떼지 않는 정직한 수당, 집과 가깝고, 업무가 많지 않고, 독립된 공간이 있는- 이른바 꿀 알바여서 도무지 그만둘 수 없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5년 차가 되었다.
오늘 아침 2025년 2학기가 마무리되는 주간을 시작하며 메일을 작성했다. 정확히 말하면 교내 메신저를 통해 서른 명의 학년 선생님들에게 공지 메일을 보내는 일이었다. 평소에도 업무 메일을 보내는데 대체로 지극히 사무적인 내용이며 분량은 서너 줄 내외로 간단한 편이다.
예를 들어, 행방을 알 수 없는 물품을 찾거나 빠른 반납을 요청하는 내용들을 쓴다. 또는 '완료되었습니다', '준비되었습니다'와 같은 단순 회신. 결근해야 하면 '개인 사정'을 언급하며 미리 자리비움을 예고하고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아니면 '마스킹테이프 10개 준비해 주세요'- 등의 애매모호한 요청에 대해 색깔이나 두께를 다시 확인하는 일 등이다. 이때 물결 표시나 ㅋ, ㅎ은 사용하지 않으며 쉼표와 마침표까지 엄격하게 구분하여 쓴다. 어쩌다 가끔 끝에 ^^ 나 :)를 사용하는 정도가 최대 일탈. 아무튼 지극히 단순하고 사무적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오늘은 평소와 달리 꽤 공들여 메일을 썼다. 결근을 알리는 공지였지만, 오늘만큼은 '개인사정'으로 인한 결근-이라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년 인사와 학기의 마무리를 겸해야 한다는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 왠지 정성스레 쓰고 싶었다. 심지어 오늘은 처음으로 ㅎㅎ를 사용했다. 평소랑 다르게 좀 신나고 들뜬, 뭉클한 결근 사유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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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학습준비물실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1/9)에는 제가 자리를 비웁니다.
그날은 저도 초등 학부모에서 완전히 졸업하는 날이어서요.ㅎㅎ
아울러 종업식, 졸업식을 앞두고 몇 가지 안내 말씀 드립니다.
1.
학급에서 사용된 물품들은 사용이 끝났다면 미리미리 반납해 주세요. 구겨진 종이, 훼손되거나 사용 불가한 물품들은 자체 폐기하고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2.
학년, 학급에서 구매하고 남아서 갈길 잃은 물품들은 이곳으로 보내주세요. 비치해 두면 다른 선생님들이 쓸모 있게 사용하시더라고요.
3.
복사 용지 박스가 많습니다. 물품 정리하실 때 박스 필요하시면 활용하셔도 됩니다.
4.
이후 2월에 새 학기 준비하실 때도 모두의 편의를 위해 코팅지, 라벨지, 판 자석- 등은 필요하신 만큼 나누어 가져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준비물실 봉사자이기 전에 이웃 학교의 학부모이기도 해서, 항상 애쓰시고 수고하시는 모습을 보며 늘 감사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보내주시는 선생님들 덕분에 즐겁게 근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긴 방학을 앞둔 이번 한 주도 무탈히 보내시길 바라고, 2026년 새해에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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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들여 썼다는 말이 멋쩍을 만큼 단순한 내용이다. '잉, 뭐지' 싶을 수도 있지만, 이 글을 쓰는 순간만큼 나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 동시에 오랜 근무 기간으로 쌓아온 친밀함, 나름의 배려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고심하며 집중해서 썼다.
수신인들은 내 아이의 졸업과 무관한 학교의 선생님들이지만, 종업과 졸업 등 각자의 학급을 마무리하는 시기였기에 수고과 애씀에 대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학기말 바쁜 업무 중에 물품들을 구분해 반납해야 하는 수고를 알기에, 때로는 생각 없이 쓰레기들을 섞어 보내는 선생님들도 있음을 알기에 정중하고 단호하게 썼다. 또한 사소한 내용이지만 상대방의 필요와 고민을 미리 파악하여 친절한 안내를 덧붙였다. 또한 모두의 협력과 편의를 강조하고자 '나누어 가져가세요' 대신 '나누어 가져가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완곡하게 썼다.
모르겠다. 나의 선의가 전달되었을지, 큰 차이가 있을지의 여부는. 어쩌면 나의 노력과 정성에 하나 관심 없는 수신인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신인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아무리 상황과 조건에 맞게 인공 지능이 척척 글을 써주는 시대라 하지만, 나는 아직 혼자 고민하고 애쓰며 글을 쓰는 것이 좋다. 자연스레 내 마음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짧은 문장 안에도 진심의 구조가 깃들어 있고,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한 문장씩 정성껏 적는 그 과정은 자기표현의 첫걸음이자 마음을 회복하는 힘이 된다. 그렇기에 글을 쓸 때도 짧은 회신을 확인할 때도 마음이 기쁘고 작은 행복감을 경험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이의 졸업을 축하한다, 그동안 감사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내용의 회신들이 왔다. 상투적이고 간결한 내용이었지만, 다정한 회신이 오갈 일이 거의 없던 메신저의 세계에서 나는 오늘 슬며시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지난 12월에는 수술과 여행 등으로 결근이 많아 눈치가 좀 보였는데, 이번 주는 왠지 당당하게 결근할 수 있을 것 같아 또한 기쁘다.
잘 쓴 문장은 단순히 유려한 필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습관적인 역지사지와 수신자에게 먼저 주는 애정까지가 한 세트다. 내 길목이 아닌 그대의 길목까지 미리 가서 서 있어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게 좋은 문장이란 말이다. 예쁜 촛불과 향기로운 꽃길에 버금가는 환대의 기운을 문장에도 불어넣을 수 있다.
<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_ 이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