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보다 이로운 가치들
오랜만에 동네 지인들과 모임을 가졌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한 언니가 아들이 집에 혼자 있다며 부랴 부랴 음식 배달을 시킨단다. 쿠팡이츠 앱을 연다. 주변에서 다들 탈퇴해야 한다는데 아직 끊지 않았다며 덧붙이는 말.
-아무리 봐도 쿠팡이 제일 싸. 도저히 못 끊겠어.
매달 쿠팡 월정액이 정확히 얼마가 인출되는지도 모르면서 최저가에 푹 빠진 언니를 보며, 불과 몇 주 전의 내 모습을 보았다. 나도 한참 미적대다 끊은 지 고작 2주 됐으면서 언니 앞에서 엄청 의식 있는 사람 행세를 했다. 사회적 책임이나 양심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기업의 행태를 운운하면서 말이다.
휴대폰 첫 화면에 자리 잡은 앱이자, 검색이나 은행 앱보다 더 자주 들락날락했던 쿠팡. 간신히 회원 탈퇴를 완료해서 이제 2주 차가 되었다. 탈퇴 과정이 신속하게 넘어가지 않고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길래 제미나이에게까지 물어가면서 힘겹게 빠져나왔다. 최대한 탈퇴를 막으려는 갖가지 술수가 괘씸 해 더욱 벗어나고자 애썼던 것 같다. 겉으로는 시스템의 문제를 불평했지만, 탈퇴를 신청하기까지 내적 갈등과 고민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쿠팡의 꿀 같은 편리함에 취해 살았었다. 요즘 세상에 고객정보 유출은 이제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내 개인정보는 공공재와 다름없다 생각하며 살았기에 처음 뉴스화가 되었을 때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비밀번호도 한참 있다 바꾸었으니 어지간히 무딘 사람이다.
이후 뉴스를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쿠팡의 점입가경스러운 실태를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쉽사리 탈퇴하진 못했다. 나 하나 탈퇴한다고 뭐 달라지나 싶어서. 그리고 탈퇴해야 하면 주기적으로 장을 보고 무겁게 짐을 나르는 수고도 해야 할 텐데. 식재료도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급히 구매했던 나에게 로켓프레시는 아주 긴요했다. 다른 플랫폼도 있지만 그것보다 쿠팡은 최저가 식자재와 생활용품들이 가득했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사실 부지런히 움직여서 한 번에 재료들을 저렴하게 구입하고 소분하고 계획적으로 메뉴를 짜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 방면에 큰 재능이 없다. 다른 플랫폼을 이용해도 되지만 쿠팡의 가성비는 독보적이었다. 일반 생활용품들도 모조리 쿠팡쿠팡쿠팡. 다음날 로켓같이 도착하는 속도와 편의에 길들여져 감각 없이 살았다.
하지만 내가 누린 모든 서비스의 이면에 불합리한 일, 안타까운 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을 하나하나 알게 되니 나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싸고 편하다고 계속 써도 될까.
나는 이타심이 크거나 인간애가 넘치는 사람도 아니다. 누가 뭐라 하든 내 방식의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살고픈 철저한 가성비주의자인데, 탈팡만큼은 필요해 보였다. 내가 누리는 최저가의 혜택은 판매자의 손실이었고, 배송의 편리성은 배송 기사의 고단한 노동이었으므로. 일회성으로 버려지는 무수한 포장재들은 또 어떠한가. 스파게티 소스병 하나에 끝도 없이 둘둘 휘감아진 뽁뽁이 비닐을 벗길 때마다 지구에게 몹쓸 짓 하는 기분이었다. 진작부터 느꼈으나 이제야 미안한 마음을 적는다.
탈팡 이후 금단 현상을 걱정했으나 오히려 냉장고를 조금씩 비우게 됐고 후련함을 얻었다. 오프라인 식자재는 가격도 좀 더 비싸고, 생활용품은 온라인에서 최저가를 찾아 헤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의외의 이로움도 있었다. 그동안 자각 없이 습관적으로 구매하였던 나의 소비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또한 몇 가지 품목을 구입하며 자아성찰을 했다.
-헤드앤숄더샴푸
사춘기 정수리 청결을 위해 특정 샴푸만 고집하는 우리 아이들. 마침 똑 떨어져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엄마 아빠가 쓰는 탈모샴푸는 싫단다. 집 앞 슈퍼에 가서 얼른 사 와도 되겠지만, 온라인 가격에 비해 몇 천 원이나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침 쟁여둔 샘플을 찾아 던져주고는 온라인 몰에서 부지런히 검색한다. 그래, 조금만 미리 움직이면 된다. 이참에 새해에는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고 살펴보며 좀 더 부지런해져 보련다.
-대란 한판과 체리 두 팩
노브랜드에서 신년맞이 세일 문자가 날아왔다. 대란 한판 5990원, 체리 1+1. 허투루 보지 않고 세일 품목인 대란 한 판과 체리를 샀다. 무항생제 유정란도 세일해서 만원이던데 그걸 살걸 그랬나 뒤늦은 고민을 해가면서. 오랜만에 체리 구경을 하는 아이들은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코코볼 같은 씨만 얌전히 남겨놨다. 겨우내 귤만 먹던 아이들의 입가가 모처럼 푸르뎅뎅해진 모습에 왠지 뿌듯했다.
살면서 경험하는 어떤 편의와 무의식적 습관에 무뎌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하나쯤이라는 생각으로 스리슬쩍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저녁 식탁에서 아이들과 쿠팡 사태를 논하면서 쿠팡을 사용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은가. 더 나아가, 올해는 나만 잘 살고 보자는 마음보다는 이웃과 약자를 돌아볼 줄 알며 불합리한 것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컬리 N마트'를 처음 이용해 봤는데 기분이 좋았다. 첫 구매고객 혜택으로 치킨 텐더 한봉 50프로 저렴하게 사서였는지, 깨어있는 소비자가 된 내 모습이 좋았었는지, 아무튼, 탈팡 금단 증상이 없어서 의외로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