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부모님 시점 메뉴
저녁 메뉴가 손에 꼽을 만큼 고정된 우리 집 밥상이 단 하루 특별해지는 날은 크리스마스이브다. 요리 솜씨는 없어도 어찌어찌 차려서 분위기를 내는 날. 올해는 대형 마트에서 이것저것 사 와서 상을 차릴 생각에 설레었지만, 저편 마음 한 구석은 답답하고 무겁기만 했다.
나는 왠지 이런 날이면 부모님이 떠오른다. 보고 싶거나 하는 애틋함은 아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묵직한 의무감과 비슷하다. '올해는 근사한 곳에 모시고 가서 식사를 해야 하나, 우리 집에 오시라 해야 하나.' 혼자서 생각만 빙글빙글. 결국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나는, 그냥 우리 네 식구 있을 때가 가장 편하고 좋다는 단순한 이기심으로 스리슬쩍 넘어가고 만다. 이 모르는 척 넘어가기 수법은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으며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죄책감을 수반한다.
엄마아빠는 일평생 두 분이서 여행은 언감생심, 어디 구경이나 맛집을 찾아다니는 노력과 낭만 같은 것이 일절 없었다. 그저 일만 할 뿐이었고 쉬는 날은 고단한 몸을 그냥 누이기에 바빴다. 엄마의 표현에 따르면 아빠는 정말 집 앞 홈플러스를 둘러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택시로 서울 온 구석구석을 다니면서도 엄마랑은 어디 좋은 곳 하나 갈 생각 못하는 아빠가 나는 늘 이해되지 않았다.
자식의 입장으로선 둘이 여기저기 재미있는 구경 하며 맛있는 것 드시며 살아가는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에 관심도 없고 시도조차 않는 모습들이 안타깝고 답답했는데, 어쩌면 내 바람과 생각대로 부모님이 살아주길 바라는 것부터가 어불성설 아닌가 싶다.
본인들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편했을 두 분을 향해 나는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까. 대부분은 염려와 걱정 어린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런 시선이 오히려 부모님은 본인들이 자식에게 걱정을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을 것 같다. 그동안 내 나름의 방식으로 부모님을 돌보고 챙기려 했던 행동들은 어쩌면 내 마음 편하기 위한 얄팍한 생색 같기도 하다.
어쩌면 엄마아빠는 그저 일하고 돈을 모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일상인 삶이었으므로, 다른 요령을 피울 줄도 여유를 누릴 줄도 모르는 게 당연했다. 먹어본 적 없어서, 다녀본 적 없어서, 해본 적 없어서- 그래서 오히려 별 욕심이 없는 삶. 사실 아빠는 젊은 날에 외도도 하고 다양한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그것도 다 먼 옛날이야기가 됐다.
살아온 대로 있는 그대로 두 분의 삶을 존중하고 인정하기보다는, 부모님 역시 내 기준에 맞춘 삶을 살아가길 바라지 않았는지 돌아본다. 부모님께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지 헤아리려 하기보다는, 그저 내 불안과 아쉬움이 덜어지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이렇게 이기적인 동시에 부모님을 걱정하는 철저한 이중적 면모로 인해 나는 마음이 늘 불편하다.
올해 크리스마스이브 아침도 비슷한 마음으로 있던 차에, 생일 용돈 입금 문자와 동시에 울린 엄마의 카톡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답 없는 생각만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무언가 해야겠는데...
"메리크리스마스 생일도 돌아오고 맛있는 것 사 먹어라"
크리스마스이브건 뭐건, 그저 있는 것으로 똑같이 저녁을 드실 두 분의 모습이 떠오르던 순간에 엄마의 문자를 본 순간 각성했다. 거창하지 않아도 돼,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거를 하면 돼. 그때 떠오른 것은 도미노피자. 엄마아빠는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맥도날드 토마토베이컨디럭스 버거와 도미노피자를 좋아하신다. 요즘에는 모든 배달이 모바일로 이루어지니, 자식들이 와서 같이 시켜 먹지 않는 한 피자도 먹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주문이 밀리는 바람에 배달 시간이 늦어져 애를 태우긴 했지만, 결국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피자를 맛있게 잘 드셨다는 이야기다.
다음날 크리스마스 오후에 엄마한테 문자가 왔다. 근처에 사는 고모가 연락해 와서 모처럼 셋이 잠실에 있는 유명 소갈빗집에서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다. 아빠의 여동생이자, 엄청난 재력가인 고모가 통 크게 쐈다는 후문과 함께. 연이어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마지막 말을 듣고 깨달았다.
-딸, 오늘 엄마 쉬는 날에 우두커니 있다고 걱정할까 봐 일부러 사진 찍어 보낸 거야. 잘 먹고 왔으니 걱정 말어.
나는 부모님을 돌봐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선지 늘 마음이 무겁고 어려웠는데, 사실 나는 나 자신을 돌보기조차 버거운 존재이며, 나를 진짜 돌보고 있는 건 어쩌면 아직도 우리 부모님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