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안에, 나 있다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고

by 다독임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었다. 이슬아 작가가 스물다섯 살이던 해, 글방의 글쓰기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들과 소통한 에피소드들이 주를 이루는 책이다. 그녀의 학생들은 초등학생부터 중고생, 성인 여성까지 다양했는데, 책 한 권안에 다양한 연령대의 글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날것의 아이들의 글도 좋았지만, 이들을 지켜보는 이슬아 작가의 소회 또한 만만치 않게 재미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글들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대하는 이슬아 작가의 애정과 시선이 얼마나 따스했는지. 장난꾸러기 친구 같으면서 다정한 언니나 누나, 때로는 듬직한 멘토의 시선에서 공감하며 요리조리 다채롭게 응원하는 모든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다. 나도 그녀의 글방 학생이 되어 정성 어린 피드백을 받고 싶을 만큼. 또 한편, 타인의 글을 읽으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소중히 여기는 작가의 곱디고운 마음까지도 배우고 싶어졌다. 아무튼 학생의 글을 대하는 이슬아 작가의 생각을 가만히 읽으며, 우리 집에 사는 고등학생 아들의 글 몇 가지가 떠올랐다.



첫 번째 글은 아들이 4-5학년일 무렵, <비밀노트>라는 제목을 단 공책에 있던 글이었다. 제목이 의아할 만큼 너무나 대놓고 공개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아들의 공책. 어느 날 호기심에 무심코 넘겨보다가 한 페이지의 글을 읽고 충격에 빠진 기억이 있다. 정확한 내용은 떠오르지 않지만 조금 순화해본다면 '엄마가 진짜 싫고 밉고 이해가 안된다'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사춘기 반항아의 치기 어린 분노의 흔적이었다. 당시 아들의 글을 읽고 나는 남편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나도 참 가지가지했다.


두 번째 글은 중학교 3학년 때 쓴 독서록이다. 본인의 인생책으로 꼽는 <노인과 바다>를 읽고 쓴 것인데, 꼬부랑꼬부랑 춤추는 글씨체 때문에 끝까지 읽기는 포기했으나 A4용지 한 바닥을 빼곡히 채웠다는 것 자체로 기특했다. 초등 이후에 마주한 아들의 글은 꽤 성장해 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해독 불가능한 서체에 한숨과 짜증이 났기 때문이리라.


세 번째 글은 얼마 전 학급 회장선거 출마를 위한 후보 연설문이었다. 확고한 공약들을 내놓는 대신 앞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공약을 만들어가고 이루어가겠다는 애매한 포부가 담긴 내용이었다. 뭔가 미지근한 콘셉트 앞에 나는 갸웃했지만, 출마는 네가 하는 것이니 널 믿노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러나 회장에서 주르륵, 부회장에서도 주르륵. 곱게 출력해서 줄줄 외우느라 바빴던 그 연설문 종이는 그날 저녁 책상 위에 마구 구겨져 있었다. 그날은 어설픈 공감과 위로의 말대신 저녁 밥상 앞에서 조용히 따봉을 날렸다. 사실 속으로는 그렇게 쓰니 떨어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말은 차마 하진 못 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아들의 글은 학교 동아리 지원서였다. 그래도 엄마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였는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곁자리를 내준 아들은 조금 부끄러워 보였다. 읽는 순간 본능적으로 비문과 논리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반사신경이 먼저 발동했지만, 몇 시간 동안 머리를 싸매며 컴퓨터 앞에서 독수리 타자를 치느라 골몰해 있었던 곰 같은 아들이 짠하게 느껴졌다. 긍정적인 피드백과 약간의 잔소리로 간단히 마무리했다.


문득, 이슬아 작가라면 아들의 글들에 대해 어떤 피드백을 남겼을지 궁금해 조금 따라 해봤다.

두 눈 부릅뜨고 엄마에게 대들지 않고 노트에 조용히 네 마음을 털어놓은 것을 칭찬해. 그래도 비밀노트는 잘 숨겨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네가 좋아하는 책을 골라 마음껏 글을 써낸 너의 성실함을 칭찬해. 그래도 글은 누군가 함께 읽었을 때 더 가치 있으니, 최소한 상대방이 잘 읽을 수 있게 쓰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 생각해. 다음번에는 차분하고 진중해진 글자를 볼 수 있겠지? 무척 내성적인 줄 알았는데 두 번이나 연속 출마하다니 용기가 굉장한데. 부모님이 엄청 자랑스러워하시겠다. 앞으로 살면서 좋은 경험이 되리라 확신해.




며칠 전 내가 예전에 썼던 글들을 천천히 읽으며 나 홀로 셀프 피드백을 남겨 보았다. "그랬구나. 잘한 일이야. 힘들었겠다. 기분은 어땠어? 진짜 웃긴다. 잘할 수 있어. 잘 될거야..." 애정어린 눈으로 읽었다. 남들이 읽는 글이지만 그 글들은 나를 칭찬하고 위로하며 달래 주었다. 다시 열심히 써보자며 마음을 곧추 세워본다. 괜한 욕심에 힘이 들어가 왠지 글쓰기가 어려웠던 요즘이지만 서둘지 않고 급하지 않기로 한다. 언젠가 또 술술 써지는 그때가 오지 않겠는가.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글이 있듯이.


대문 사진은 내가 출강하는 Y초등학교의 아홉 살 이지예의 글과 그림인데, 글과 아주 잘 어울린다. 고마워 지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