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의 안경인가

패션 안경 말고 돋보기안경

by 다독임

초등학교 4학년 때 설레는 마음으로 첫 안경을 맞추었던 기억이 있다. 왠지 똑똑해 보이고 예뻐진 것 같아 한없이 들떴던 그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가끔 그때의 기억을 두고두고 곱씹어 봤다. 나는 정말 시력이 나빠서 쓴 걸까, 쓰고 싶어서 쓴 걸까 하고.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시력이 별로 나쁘지도 않았는데 엄마아빠를 졸라 안경을 써야 한다고 우겼던 것 같다. 물론 안경사가 일부러 좋은 시력에 안경을 씌우진 않았겠지만, 만약 안경을 늦게 썼더라면 시력이 덜 나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하곤 했다.


그렇게 이럴 때부터 쓰기 시작한 안경은 점점 두꺼워져 고등학교 무렵 돌돌이 안경이 되었다. 눈코입처럼 얼굴의 일부가 된 안경을 처음 벗은 것은 고3 졸업을 앞두고 서였다. 친구와 안경을 맞추러 갔는데, 안경 벗은 나를 처음 본 친구가 깜짝 놀라는 게 아닌가.

- 너 눈이 원래 이렇게 컸어?


일찍부터 돌돌이 안경을 벗고 콘택트렌즈를 꼈던 친구는 너도 이제 안경을 벗어야 한다며 렌즈 구입을 강하게 권면했다. 안경을 오래 쓴 사람들은 안다. 안경을 벗는 것은 마치 옷이 벗겨진 것처럼 부끄럽고 어색하다는 것을. 그렇게 친구와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충동적으로 소프트렌즈를 맞추었는데, 그날 이후 안경을 써야 예쁘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제 안경을 쓰고선 도무지 밖으로 나다닐 수 없는 렌즈 중독자가 되어버렸다. 나에게 유리 알 너머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그 친구가 나는 지금도 고맙다.


스물여덟에 시력 교정 수술을 하고 난 뒤에는 안경 생활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를 만끽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40대가 되어선 눈부심에 몹시 취약해지긴 했지만, 시력 교정술은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잘한 선택 중 하나라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깨알 같은 글씨를 볼 때면 고개를 뒤로 멀찍이 하는 나를 느꼈다. 이것은 노안이라 씁쓸해하던 주변 지인들의 모습과 비슷한 자세 아니었던가. 아무리 실눈을 떠보고 고개를 뒤로 해도 보이지 않을 때는 휴대폰 카메라로 확대하여 찍은 다음 갤러리에서 확인해야 했다. 이 정도면 돋보기안경을 써야 한다는데, 어린 시절 섣불리 안경을 맞추어 후회했던 기억 때문인지 안경과 친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세월 앞에 장사 없으니 언젠간 써야겠지 하는 마음으로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다 몇 주 전,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나이 듦과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최근에 친구가 안경을 맞췄다는 소식을 들었다. 양안 시력이 1.5 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릴 때 불편하다며 돋보기안경을 맞추었다나. 호기심에 슬쩍 써 보았는데 아니 웬걸, 흐릿하게 보이던 책 속의 활자가 선명하고 큼직큼직 보이는 게 아닌가. 안경에 대한 기억이고 불편함이고 뭐고 당장 써야겠다 싶었다.


미루고 미루었다 남편과 안경점을 찾았다. 나는 근거리가 잘 보이는 돋보기안경을, 패션 안경을 끼는 남편은 근거리 시야 확보도 가능한 다초점 안경을 사이좋게 맞추었다. 나 홀로 안경을 맞추었다면 왠지 서글프고 씁쓸했을 테지만, 동시에 찾아온 노안 이슈 덕분에 돈독한 부부애를 확인했다.


시력 검사를 마치면서 안경사님이 조심스레 나의 생년(生年)을 물어보았다. 8로 시작하는 숫자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딱 '초기'라며, 이즈음 다들 찾아온다고 했다. 더 이전 분들은 대개 참다못해 오는 경우가 많다며. 지나가는 말일지언정 '초기'라는 그 두 글자의 위로감은 꽤 컸다.


오랜만에 안경을 쓰니 콧등이 묵직하긴 하지만, 책을 읽을 때 눈의 피로감도 확실히 덜하고 집중력도 높아졌다. 요즘 멀리 있는 글씨도 좀 흐려 보이곤 하는데 언젠가는 난시 교정 안경을 써야 할 때도 오지 않을까. 잘 안 보여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면 미간 주름에 보톡스도 맞아야 할 것 같고, 점점 더 손댈 게 많아지기 전에 그때까지 맨 얼굴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야겠다. 아, 루테인도 빼먹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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