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용 경차가 숨 넘어가는 때라 차를 바꾸고 싶은 걸까. 남편의 출근용 경차는16년 동안 23만 킬로를 뛴만큼,달리는 속도보다 수리비 나가는 속도가 빠르다. 세월의 고단한 흔적을온몸으로 증명하는 진회색빛 모닝은당시 1200만 원. 신혼저축으로통 크게 일시불로 산 우리의 재산1호였다.
언젠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하지만, 아직은 탈만하다며미뤄오고 있는 참이었다. 남편은 출퇴근용 경차이면서 디자인도 예쁘고 전기차이니 캐스퍼 신형 전기차(EV캐스퍼)가 눈에 쏙 들어왔나 보다.당장 새 차를 살 수는 없지만 한번 타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마음으로 가보기로 했다.
요즘 차는 어떨지 궁금했다.또 다른 패밀리 카는 둘째를 출산할 때 마련했으니 12년이 됐다. 게다가 나는운전만 겨우 할 뿐이니 요즘 차최신 사양에 대해 알턱이 없다. 그저 추운 겨울에 뒷자리에서 떠는 아이들을 위한 뒷자리 엉뜨, 트렁크의 짐을 양손에 들고 끙끙대지 않도록 자동 닫힘 버튼만 있어도 좋겠다는 마음만 있었다. 아, 지하 주차장 경사면에서 멈췄다 출발할 때 뒤로 밀리지 않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추가. 요즘 차들은 이런 게 기본이라던데 너무 소박한 바람일까.
시승 체험은 처음이었다. 자동차 회사에서 잠재 고객들을 위해 드라이빙 센터를 운영한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됐다. 혹시 영업을 하지 않을까 부담스러움도 있었는데 그런 분위기는 일절 없었다. 간단히 확인서를 쓰고 주행 코스 안내를 받은 다음 차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가면 된다.
캐스퍼 하면 뭐니 뭐니 해도카키색 아닌가. '예쁘다! 생각보다 큰데?' 힐끔힐끔 눈빛을 날리며 다가간다. 매끈한 무광에 선루프까지 탑재한 풀옵션의 시승차는 근사했다.
매력적인 외모에 반한 것도 잠시, 조수석에 앉으니 새로운 세상에 들어간 기분이다. 마치 과학관 이색 체험 공간에 들어간 것처럼. 전기 차인만큼 차체가 넓고 깔끔한 데다 훤히 들어오는 디스플레이 패널과 푸른 조명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차내 환경을 섬세하게 조정할 수 있는 각종 버튼들과 네 식구 앉아도 여유 있는공간까지. 오래된 차만 타본 나에겐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남편과 여기저기 매만지며 감탄을 하다 서둘러 주행 코스를 찍고 출발한다. 접수하고 인계받는 것까지 포함해 총 1시간이니 주행 시간은 3,40분 정도로 보면 된다. 출발해서 달려보니 새 차 구경에 신났는지 차로 꽉 막힌 도로 한복판도 답답하지 않았다. 유난히 날이 좋았던 것도 설레고 들뜨는 데에 한 몫했다. 저 멀리 롯데타워가 보이는 쾌청한 날에 새 차 드라이브라니 데이트 부럽지 않은 이벤트였다. 결혼 16주년 이벤트.
장신의 남편도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는 차체 높이, 엔진 소음이 없는 적당한 고요도 좋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방향 지시등(깜빡이)을 켤 때마다 그쪽 사각지대가 보이는 기능이었다. 고개를 돌려 사이드미러를 보던 게 수고로움처럼 느껴지다니. 이뿐인가. 너울대는 충전선이 없어도 간편하게 충전할 수 있는 거치대, 작은 가방을 걸 수 있는 고리, 하나하나 새롭기만 하다.
가격은 36,393,670원.
잠깐의 드라이브를마치고 나오니 놀이기구를 타고 나온 듯 후련한 아쉬움이 남는다. 기념품으로 받은 폴리에코백까지 쏠쏠한 득템으로 시승 이벤트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이제 현실의 차로 돌아가보자. 무릎이 닿는 좁은 운전석, 찐 아날로그 방식의 작동 다이얼(그마저 하나 빠져버렸다), 스마트하지 않은 꽂는 차 키 등등. 초라해 보이지만 오랜 익숙함이다. '부하앙' 강렬한 엔진음을 내며 출발하니 들썩이는 승차감에 안온감이 전해온다.
-아직 탈 만 하네.
주차장에서도착해 워셔액을 리필하고 본넷을 닫는데 맞물리는 부분이 잘못됐는지 닫히지 않는다. 하필 새 차 타고 오는 날 이럴게 뭐람. 그렇게 남편은여러 날을 본넷이 덜 닫힌 채로출퇴근했는데, 며칠 후 카센터에서 잘 고쳐졌다
-진짜 더 탈 만 하네.
10년 넘게 타던 차를 중고로 팔고 새 차를 살 때 아쉬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던 지인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우리도 이 차를 떠나보낼 때 눈물이 날까? 다른 주인에게 보내는 것도 눈물이 났다던데 폐차가 될 때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도로에서 무시당하기 십상이지만, 이차로 달린 거리와 추억만큼은 어떤 새 차와 비할 수 없는 소중한 보물 같다. 그래, 미련 없이 멈출 때까지 타보자. 다만 예고 없이 갑자기 멈추지만 말아주길. 우리 통장이 준비가 될 때까지 열심히 달려주길 바란다.
여전히 새 차 구입을 꿈꾸는 남편은 또 시승을 신청했다.기아 EV3. 지난번 시승의 강렬함이 너무 컸던 걸까. 이번엔 마치 우리 차인 것처럼 자연스레 끌고 한 바퀴 휘리릭 돌아보고 마쳤다.
새 차를 당장 사진 못해도, 언젠가 통 크게 살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하며 내년에도 열심히 살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