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까마득한 2020년 2월. 초유의 감염병 사태에 모두들 우왕좌왕 어리둥절하던 때다. 반강제로 급식실 배식 알바는 그만두고, 반반치킨처럼 홀가분함과 아쉬움 반반으로 지내던 어느 날. 동네 주민센터에서공공 근로를 하는 지인의 연락에게 왔다.
급히 방역 일자리를 뽑고 있는데 할 생각이 있냐는, 최저 시급이지만 주휴 수당도 있고 4대 보험도 된다며 온갖 장점을 줄줄 읊어댄다. 평소 자주 연락을 하던 사이도 아니었는데 왜 나에게 연락을 했을까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냥 앉아서 온도 재고 손소독 확인만 하면 된대. 점심시간에는 잠깐 집에 가도 되고 괜찮지?!"
한 달에 120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하네 마네 심난한 데다 학교도 못 가는 아이들을 그냥 집에 두어야 하고, 9시부터 4시까지 제법 긴 시간인데 괜찮을까. 고민은 잠깐이고 매력적인 금액에 넘어가 덜컥하기로 한다.
현타도 오지만 꿀알바니까 괜찮아
"선생님, 여기 체온 재고 손소독 하고 가세요."
"마스크 안 하시면 못 들어갑니다."
기계처럼 읊어대며 사람들을 안내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못 들은 체하는 사람, 열 안 나니 그냥 들어가겠다는 사람, 손소독 하고 와서 안 해도 된다는 사람, 비접촉식 체온계가 정확하냐며 타박 놓는 사람, 오색찬란한 사유들을 대가며 우기고 짜증 내는 별 사람들 다 있다. 혹시라도 바이러스가 옮겨올까 예민하게 날 서 있던 시기이긴 했지만 여러 번 현타가 왔다.
한주, 한 달,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늦겨울 냉기의 스산함을 느끼다가, 마스크에 가려져 봄꽃 향기를 느낄 새도 없이,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던 막막한 여름까지 무료하게 지나갔다.
다들 멈추고 웅크리던 그 시기, 나도 주민센터 로비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멈춰 있었다.
점심마다 집에 가서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 저들끼리 지지고 볶는 아이들과 영상 통화로 안부를 확인하는 그런 날들. 엄마가 보고 싶던 아이들은 제각기 할 일들을 하다가 오후가 되면 마을버스를 타고 와서 주민센터 마당에서 두어 시간 놀고 함께 퇴근하는 어쩌면 평온한 일상이었다.
일자리를 시작한 초기, 동네 지인들은 다들 염려하는 눈치였다. 애가 1학년이고 학교도 못 가는데 굳이 그걸 해야 하냐는 그런 의구심 가득한 눈빛. 그러다 코로나라도 감염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가장한 편견. 그 당시엔 자존감이 낮았는지 움츠러들기도 했고, 굳이 일자리를 말리지 않는 남편에게 괜한 타박도 부렸다. 물렁물렁 ISFJ는 어쩌다 마음이 조금씩 단단해지도록 강제 수련을 당했다. 그렇게 두어 달이 넘어가자 독박 육아에 지친 동네 지인들은 서서히 나에게 부러움의 눈빛을 발사했다. 흥.
'애들이 좀 걸려서 그렇지, 이거 완전 꿀알바야.'
남들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이 늘 편했던 것만은 아니다. 함께 근무하는 언니와 교대로 하다 보니, 빈 시간이 제법 많았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은 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레이더망에 포착된 건 저 주민센터에 앉아있는 공무원들. 민원에 시달리는 자리라지만 매시간 안정적으로 출퇴근하는 그들을 나는 또 부러워한다. 원래 부러울 때는 좋은 모습만 보이기 마련이니까. '예전에 공무원 시험을 볼 걸 그랬나.' 하는 믿고 끝도 없는 자괴와 무기력함이 또다시 덮쳤다.
뭐라도 하자는 강박, 실상은 도파민이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그들을 먼발치서 지켜보며, 공무원에게 필수라는 컴퓨터활용능력과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에 도전하기로 한다. 컴알못은 아니지만 독서지도사에 이어 자격증 한 줄 업데이트하기 위함이었다. 틈틈이 유튜브 강의와 교재를 봐가며 또다시 느끼는 배움의 즐거움. 뭐라도 해야 한다는 그 강박의 이유는 어디에서 왔을까. 한 직장을 10여 년 성실하게 다니는 남편, 은퇴 시기가 이미 한참 넘은 나이에도 노동을 쉬지 않는 부모님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인 걸까.
뭘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보는 것, 그 강박의 행동은 실상 나를 일으키는 도파민이었다.
움직여야 했다. 나 같은 경력단절자는 증명할 길이 그것뿐이다. 이력서에 한 칸이라도 더 채우는 일.
몇 주 빠짝 공부하고 20대의 젊은 이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시험을 봤다. 남다른 타자 속도와 벼락치기에 능한 재주를 가진 나는 가뿐하게 두 자격증을 따냈다.
여름의 막바지를 지나고 나니 어느덧 6개월 계약 종료. 주민센터에서는 재계약 의사를 물어왔지만 내 대답은 '아니요".
평범한 엄마로 돌아갔다. 매달 들어오던 월급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6개월이나 했으면 이제 됐다 싶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 일이 아닌데'라는 이 배부른 여유는 사실 실업급여에서 기인했다. 배식 도우미를 하며 채워온 기간과 합쳐져서 실업급여는 꽤 쓸모 있었고, 아이들과 각종 취미생활을 만들어가며 창의적으로 놀았다. 문 닫았던 도서관이 열리는 날이면 책을 양껏 빌려다 날랐고, 그때 시작한 독서의 경험은 지금까지 나의 성장에 자양분이 되었다.그렇게 저물어가던 2020년. 학교도 드문 드문 등교 소식을 예고하며 슬며시 움직이기 시작할 기미가 보였다.
어라? 애들이 학교 가면 나 뭐라도 또 해야 하나.
지난번 자원봉사 하면서 교육청과 연을 맺어본 짬으로 이제는 지역 교육청 위주로 구직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