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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스케줄러에 쓰여있지 않은 것

잘 쓰는 것보다 잘 실천하는 것을 칭찬할게.

by 다독임

각종 교육서와 유튜브 영상에서 강조하는 공부법 중의 하나,

학습 스케줄러


그날의 공부를 계획하며 효율적인 시간 배분을 할 줄 아는 능력, 공부 습관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기르는 학습 스케줄러의 이점은 자기주도 학습의 기본 소양으로 익히 알려진 바다.


학원은 안 보낼지언정 돈 안 드는 이런 정보들은 꼭 따라 실천하는 나라는 엄마. 학원을 안 가고 시간이 펑펑 남아도는 우리 집 아이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습관이라 생각했다. 하교 후 집에 와서 쉬다가 어영부영하다 보면 하루가 어느새 훌쩍이니까.


일단 중학생 첫째에게 스케줄러 쓰기를 권했지만 1년 넘게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엄마만 대차게 권할 뿐, 아들은 머릿속에 계획이 다 있으니 쓸 필요 없다고 절레절레한다. 머릿속 계획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니 대충이라도 정리해 보자 해도 도무지 말을 안 듣는다. 손으로 쓰고 정리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타입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춘기엔 엄마의 말과 잔소리는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끝까지 참으로 구질구질했다.

언젠가 시험 기간을 앞두고 시험공부 계획표만 써보자- 해도 그것도 싫단다. 마치 엄마가 하자는 건 뭐든지 싫다고 말하는 조건반사처럼. 천사같이 고분고분하던 먼 옛날 꿀민이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다.



이거 정말 좋은데, 왜 안 할까-라는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품고 지내던 어느 날. 초등 5학년 딸과 함께 아트박스에 갔을 때 스케줄러 매대 앞에서 우연히 발걸음을 멈췄다. 알록달록한 데다 스티커도 다양하게 들어있길래 요즘에는 스케줄러가 참 예쁘게도 나오는구나 생각했다. 순간, 잠시 잊고 지내던 학습스케줄러의 욕망이 고개를 쳐들고 타깃을 딸로 바꾼다.

-그렇지! 이제 얘도 쓸 데가 됐다.


동시에, 지난여름 딸의 학교 통지표에 쓰인 담임 선생님의 종합의견을 떠올리며 계산 전부터 김칫국을 마셔댄다.

뛰어난 공책 정리 능력을 바탕으로 학습에 대한 집중력과 탐구 정신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고 있음. 우선순위를 정해 과제를 체계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이 인상적임.


역시 예쁜 문구용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딸은 엄마가 예쁜 '물건'을 사줬다는 기쁨이 우선이었다. 쓰고 정리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스케줄러도 즐겁게 쓰기 시작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공부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스스로 정리하고 실천하려는 노력 자체가 기특했다. 한편으로 아들에게 못 푼 한(?)을 딸을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 같다는 씁쓸함도 있었다.


세 달간 꾸준히 실천한 딸은 스케줄러 마지막 장까지 다 쓴 다음날, 알아서 다이소에서 새로운 스케줄러를 사 왔다. <나의 공부일지>라니, 이름도 표지도 참 예쁘지 않은가. 욕심 많은 현실엄마는 사실 공부하려는 마음을 더 예쁘게 본 것 같다.



감성적인 표지의 새 스케줄러는 마치 N수생들것처럼 칸도 촘촘해지고 공부계획 항목이 길었다. 딸은 세 달간 써온 습관을 밑천 삼아 이번에도 하루씩 도장 깨기 하듯 꾸준히 써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어김없이 예쁜 글씨와 꼼꼼함을 칭찬하고 수학 문제집을 펼쳐 든 주말 오후였다.

그날은 현행 수학 심화 문제집을 풀어야 했는데 영 안 풀리는지 갖은 짜증과 툴툴대는 말들을 쏟아냈다. 어려운 문제를 끝까지 붙잡는 모습을 우쭈쭈 칭찬하는 것도 그날은 통하지 않았나 보다. 오늘은 절반만 풀고 마무리하자는 말에 아이가 순간 눈물을 왈칵 쏟아낸다.


-이미 계획을 다 썼는데 안 하면 어떻게 해.


-지우개로 지우고 고치면 되지. 매일 100%를 못할 수도 있지. 괜찮아!


-싫어, 싫단 말이야. 엉엉엉 꺼어윽 헝헝~~~


수학 문제에 대한 짜증, 완벽하지 않았던 오늘의 공부계획에 대한 불만족 이상의 화에 휩싸여 한참 서럽게 울었다.




인스타나 공부 관련 카페를 돌아다니다 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완벽에 가까운 필기와 스케줄러 인증을 볼 수 있다. 그때마다 떠오른 감정들은,


부럽다/ 우리 애는 왜 못하지/ 아들은 글씨가 개발새발인데 얘는 어쩜 이렇게 잘 쓰지/ 우리 애도 이렇게 하면 좋겠다/얘는 공부도 잘하겠지/ 어떻게 이렇게 필기를 할까


대부분 못난 비교의 감정과 불안 따위였다. 그런 날이면 괜히 혼자 종종 대며 애먼 우리 집 아이들을 들볶은 것 같다.



딸아이가 쏟는 짜증과 눈물을 보고서야 학습 스케줄러의 본질을 생각해 봤다. 그동안 나는 겉으로 완벽 깔끔한 스케줄러만 봤을 뿐 이면의 것들을 보지 못했던 거다. 매일 비슷한 공부 계획이라도 한 줄 한 줄 쓰면서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매일 성실하게 제 할 몫을 해냄을 칭찬해야 하는데 스케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아들을 들볶았다. 네댓 줄의 계획쯤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딸의 성실함을 평가절하했다.


가만 보니, 딸의 학습스케줄러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한가득 쓰여있었다.


-엄마의 눈치와 잔소리,

-너무 하기 싫은 날의 마음속 낙서,

-피곤해도 끝까지 해보려는 본인의 노력,

-오늘 목표에 달성했다는 성취감,

-나 자신에 대한 칭찬과 뿌듯함

.

어떻게 하면 칸을 더 채우게 할 것인가 하는 엄마의 못난 욕심도 혹시 쓰여 있었을까.


부끄럽고 미안했다.


-저녁 공부 시간이 되면 공부할 책을 펴기

-매일 공부와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알기

-하고 싶지만 나중에 해야 하는 것은 미뤄두기

-하기 싫지만 지금 해야 하는 것을 우선하기

.

<공부독립만세를 외치는 그날까지> 이 매거진의 제목처럼, 엄마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공부의 양과 기록에 대해 채찍질 하기 보다는 꾸준히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근본의 힘을 길러줘야겠다.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한들, 실천이 가장 어려우니 지속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힘을 돋우고 지혜롭게 독려해야 할것이다. 부모 노릇도 쉽지 않다.


그래도 방학이니 공부시간을 좀 늘렸으면 하는 엄마의 욕심은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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