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가 끝났다. 주요 과목(국. 영. 수. 과)만 쏙 빼고 암기 과목 역사, 한문, 도덕만 100점을 맞는 기이한 결과가 나왔다. 암기 과목 100점이라는 것은 기를 쓰고 외웠다는 성실함을 증명하지만, 한편으로 공학도를 꿈꾸는 아이가 수과학 점수가 제일 낮다는 것이 또 한 번 걱정을 부추긴다. 어떤 빈틈을 찾아 공부해야 할까하고 엄마 홀로 들썩인다. 그래서 겨울방학을 앞두고 일단 오랜만에 레테 한 번.
기말고사 충격의 불꽃이 꺼지기 직전, 며칠 전에 아이를 잘 꼬셔서 영어학원 레벨테스트를 예약했다. 수학은선행을 많이 하지 않으면 볼 만한 데가 없으므로 일단 보류. 먼저 이삼일 간격으로 스팸 문자를 보내는 대형어학원 하나를 골라 날짜와 시간을 예약했다. 의도치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내 생일이다.
-꿀민아. 오랜만에 한번 가자. 겨울방학도 있으니 학원 안다녀도 네 상태 점검은 해야 하지 않을까.
평소 같았음 인상부터 팍 썼을 아들은 순순히 알겠다고 한다.
-그날 엄마 생신이니까 그럼 기분 좋게가보겠습니다.
내 생일 아침, 지금 옆 건물에서 아들은 레벨테스트 중이다. 며칠 전 약속은 온 데 간데없고 잔뜩 우거지상을 쓴 얼굴로 들어갔다. 향후 6개월 간 테스트 얘기 꺼내지 말라며, 결과에 실망하지 말라며 모종의 협박 같은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사춘기언어는 뇌를 거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심한 엄마는 상처를 받고 만다.옆카페에서 아들을 기다리며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연신 들이킨다.
매일 흔들리고 불안한 이 경쟁에서 엄마가 바로 서야 한다는 말을 수십 번 들었음에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초등학교 때부터 힘 뺄 필요 없으며 현행만 튼튼히 다지고 준비될 때 뛰어도 충분하다 했다. 하지만 이미 저 멀리 뛰어가는 다른 집 아이들을 보면 엄마는 불안하다. 내 아이가 영 쫓아가지 못할까 봐.
가만 생각해 보면 반드시 한 곳으로 뛰어가야 할 필요도, 같은 속도로 뛰어갈 필요도 없는데 목적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달려야 하지않나 조바심만 내는 내 모습을 본다.
최근 KT에서 대규모 인원감축을 실시했다고 들었다. 자녀 학자금과 향후 몇 년간의 월급과 퇴직금까지 꽤 매력적인 조건을 걸었다는데, 그만큼의 조건을 제공하면서까지 인원을 감축한 이유는 ai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할 일을 충분히 ai가 할만하다는 것을 감안한 것일 텐데, 이제 정말 눈앞에 닥쳐진 현실을 보니 마음이 서늘해졌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성적을 올리는데만 관심을 갖고 급급하던 나는 또 멈칫한다. 당장의 성적과 입시 방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미래에 대해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부모가 되는 게 먼저 아닐까. 그게 어렵다.
*레테 후기
-엄마! 레테 보고 실력 점검을 한다는 건 아는 범위 내에서 풀고 확인한다는 건데 이건 아니지 않아? 거의 다 찍은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점검이야.
잉?타 학원보다 좀 더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문제를 푸는 아이들이 분명 수두룩 할 테지. 나는 평범한 내 아이가 매일 지문을 읽고 단어를 외우는 성실의 힘을 한번 믿어 보려 한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