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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듬 Jan 09. 2023

유럽에서 아시안으로 판데믹을 살아내기

아시안이 코로나를 통해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과 인종주의

1.     유럽에서 경험한 코로나와 오리엔탈리즘


   코로나가 발발한 무렵 공교롭게도 나는 독일에서 유학중이었다. 코로나가 곧 유럽사회에 실질적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경각심은 대중적으로 아직 널리 퍼지지 않은 상태였고, 먼 나라 중국에서 전파되고 있다는 바이러스에 대한 흉흉한 괴담과 엽기적인 루머만이 떠돌 뿐이었다. 반면 나는 바이러스라는 단어와 중국이라는 단어가 한 헤드라인안에 같이 놓여있는 것 자체에서 불길한 예감을 직감했는데, 이는 곧 야만, 비위생, 비문명과 같은 중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스테레오타입이 바이러스라는 심볼과 맞아떨어지는 어떤 지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과연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방중 여행으로 비행기를 타는 날이었다. 비행기 좌석을 찾아 채 안기도 전에 통로측 좌석에 앉은 승객은 너무나 '아시안'같은 내 외모를 보더니 코를 막으며 내 국적을 심문하고 내게 바이러스가 없는 것인지 재차 묻고 나서야 창가측 좌석으로 가는 길을 터주었다. 장난이라고 너털웃음을 치는 그 사람에게 정색하며 대응했다. 승무원에게 자리를 바꿔줄 것을 요청하고 싶었으나 일제히 나에게 집중된 시선 속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엄습하는 무력감과 공포를 느꼈다. 나는 지옥같은 비행시간을 구석진 창가자리에서 한껏 웅크린 채 견뎌야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고도 상황은 달라질 게 없었다. 나는 코로나 이전부터 쭉 독일에 거주하며 아시아 국가를 방문한 이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국여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입국심사대에서 분류되어 한 시간 동안 검문을 받았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 도착한 시내에서 낯선이로부터 “니하오 코로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코로나는 여전히 내게 유럽사회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며 느꼈던 취약한 감각들을 떠오르게 한다. 팬데믹으로 촉발된 동양인에 대한 혐오는 유럽내 아시안 사회에 가히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한편 나는 코로나로 인해 유럽사회에서 특별히 인종차별적 인식이 고취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다만 그들이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도록 ‘터부’라는 모종의 사회적 억제(입막음)체제가 작동하고 있었을 뿐. 코로나라는 ‘특수’상황은 그 체제를 망가뜨리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고삐를 푼 계기였던 것이다. 코로나는 그들이 마음 놓고 활개 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주었고, 더 이상 사람들은 평소에 품고 있던 그 우스꽝스러운 생각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속에서 나에게 위협이 ‘다가온다’는 느낌보다는 맨몸으로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방치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고없이 들이닥친 바이러스로 인한 전세계적 카오스 속에서도 남한은 ‘성공적인’ 방역성과를 보였다. 한국의 언론은 세계가 주목하는 K-방역이라며 일제히 외신의 보도를 옮겨 적었으나, 나는 독일에서 ‘그 외신’의 보도를 발견할 수 없어 의아했다. 오히려 남한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독일의 신문기사들은 K-방역모델의 ‘적용불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이는 서구와 동양의 멘탈리티 차이에 기초한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 해석을 골자로 했다. 기사는 남한사회의 멘탈리티는 시민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수용하고 규제에 순응하기에 독일사회는 남한으로부터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기자는 “유교의 영향으로 한국인들의 대다수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가부장적인 정부를 따르려는 의지가 높을 것”이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1] ―해당 기사는 아래에 덧붙임


   오리엔탈리즘은 복잡한 아시아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아시아 간의 차이를 뭉개버린다. 코로나 초기 몇몇 재외한인들 사이에서 차별을 피하기 위해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라는 말이 전략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완전히 무용했는데, 첫째는 바이러스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이유에서이고, 둘째는 돌아오는 대답은 결국 “한국? 거기나 중국이나 다 똑같은 데 아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럽사회의 오리엔탈리즘을 몸소 겪어내는 와중에 한국에서의 중국인 입국금지 청원을 보는 기분은 묘했다. 한국인들은 “중국인이 아시안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재외한인사회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느끼는 위협은 그 ‘중국인이 퍼뜨렸다’는 바이러스가 아닌,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전파되는) 중국을 너무나 싫어하는 누군가들의 혐오였다. 나에게 그 혐오는 한국과 유럽의 것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2.     코로나와 혐중현상


   만약 코로나 시기 혐중현상이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다면, 서구와 동양의 이분에 기초한 서구 선진사회에 대한 선망, 열등감, 동양탈출의 욕망이 동반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방역의 과정에서 남한사회는 서구유럽의 사재기 현상 등 여러가지 사회혼란들을 ‘미개함’으로 규정하며 서구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그래서 나에게 혐중은 오히려 한국이라는 내셔널리티 내지는 허구의 한민족에 대한 무궁한 우월감에 기초해있는 유사 인종주의로 읽힌다. 나는 소위말하는 ‘국뽕’이 이런 맥락에서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코로나를 계기로 어떻게 ‘국뽕’과 한민족주의가 원색적인 인종주의로 확장될 수 있는지 그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정부가 방역을 이끌고 국민들을 질서있게 통제하는 과정에 있어서 애국주의가 유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방역주체로서 국가와 국민을 동일시함으로써 세계를 대상으로 방역성과를 경쟁하는 하나의 방역올림픽을 보는 것 같았다. 한국사회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코로나에 걸리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고, 전 국민적으로 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은 크게 고취되었다. 신천지,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집단들이 감염사실을 알리지 않고 음지로 머묾으로써 방역에 차질을 겪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K방역의 ‘적용불가능성’을 논했던 독일기자의 판단은 일정부분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국가와 국민의 동일시는 적어도 국가주의의 쓴맛을 본 독일사회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다. 독일이 남한의 방역모델을 베껴오더라도 동일한 효과를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남한의 방역은 분명 ‘체계적’이었지만, ‘성공적’이었는지는 면밀히 따져보아야할 대목이다. 그것이 순전히 바이러스로부터의 방어였다면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매개로 사회의 더 깊숙한 곳에 침투하여 사회의 근본적인 곳부터 망가뜨리는 혐오에 대한 방어는 분명히 실패했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코로나에 대한 대중적 혐오감정은 크게 증폭되었고, 현재까지 이에 대한 제동장치는 없었다. 한국사회가 했어야하는 것은 방역시스템의 선진성에 대한 자찬이 아닌, 코로나에 사회문화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인구에 대한 보호와 인종주의에 기반한 혐오의 확산경로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

          

[1]

 “Von Seoul lernen?”, Frankfurter Allgemeine, 2020.03.29, 

https://www.faz.net/aktuell/politik/ausland/coronavirus-suedkorea-gilt-vielen-in-der-bekaempfung-als-vorbild-16701423.html?GEPC=s3


*2022년 3월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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