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5(D-1)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지난 십수 년간 입버릇처럼 떠들어 댄 계획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지겨울 정도로 늘어놓은 이 이야기가 이 글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생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은 결론부터 펼쳐 놓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들과 1년여의 세계일주를 떠나기로 했다.
이 계획이 처음 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내게는 10년을 만난 여인이 있었는데 이 친구에게 취직 대신 글을 써보고 싶다고 하자 가차 없이 헤어지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민 끝에 나는 그녀의 요청대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보기로 했지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40 중반이 되면,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가 되면, 그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이와의 세계 일주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새로이 얻을 수 있다는 설렘보다, 가진 것을 잃는 것이 훨씬 무서울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절대 회사를 뛰쳐나오지 못할 것이라 강하게 확신했을 것이다. 그녀의 속을 모르니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조건은 받아들여졌고 나는 그녀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물론 그녀가 남편과 아들의 여행을 하루 앞둔 지금도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약속대로 16년이라는 아주 긴 세월을 회사원으로 살았다.
지난 5월 31일을 끝으로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고백하자면 퇴사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 결정하고 난 후의 심경, 그 이후 이 여행을 계획하면서 겪었던 많은 일들을 모두 글로 남기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꾸 걸어 나가면>은 조금 더 일찍 시작되었어야 했다. 굳이 내 게으름의 핑계를 대자면 400일 가까운 여정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이 여행에는 '무조건', '끝까지', '무사하게' 지켜내야 할 존재가 함께 하지 않는가. 그건 굉장히 큰 부담이었고 모든 상황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했다. 나라를 정하고, 도시를 정하고, 각 지역마다 봐야 할 것들을 정해야 했으며 이동 수단과, 숙박 시설, 예방 접종까지 어느 것 하나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출발을 하루 앞둔 지금 결국 내 계획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다.
우선은 떠나기로 한다. 누군가는 무모하다 하고, 누군가는 낭만이라 외치는 이 여행의 기록이 훗날 돌이켜 봤을 때 어떤 성격을 띨지 알 수 없다. 세계 일주를 기록한 여행기가 될지, 한 아이의 육아서가 될지, 그도 아니면 40대 중년의 성장 일기가 될지 가늠할 수 없다. 일단은 자꾸 걸어 나가 보자. 그 끝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건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1년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루하루 기록한 이야기들을 펼쳐 놓으면 이 여행이 나와 아들의 인생에 어떤 의미였는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