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6(D-day)_타이완/타이베이
영화 타짜에 보면 고니가 아귀와의 마지막 결투를 하러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깁스를 때려 부수고 호기롭게 매표소 앞에 선 그에게 기차표를 판매하는 직원이 묻는다. "편도요, 왕복이요?" 고니는 잠깐 멈칫하고 왕복이라 답한다. 목숨을 건 대결을 앞둔 타짜마저도 왕복표를 끊는다. 그렇다. 나도 늘 그랬다. 국내 여행은 물론 국외 여행을 준비하면서는 더더욱 편도 표를 구매한 기억이 없다. 떠나는 날이 있으면 돌아오는 날이 있었고 너무도 당연히 왕복표를 구매하기 마련이었다.
이번 여행은 아직 끝이 정해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예정이라는 대전제 정도만 확정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현재 모든 국가 간 이동 수단은 편도로 예약하고 있다. 그게 비행기든지, 열차든지, 페리든지 마찬가지다. 그리고 오늘 편도 표를 소유한 자의 서러움을 적잖이 맛봤다. 우선 모바일 체크인은 거부당했다. 편도 표는 모바일 체크인을 할 수 없단다.(항공사마다 다른지 모르지만) 급한 마음에 공항에 일찍 도착했는데 키오스크도 나를 거부한다. 직원분의 도움으로 겨우 체크인에 성공했는데 그마저도 언제 대만을 떠나는지 등의 질문에 성실히 임하고 난 뒤였다. 한국을 떠날 때도 이럴진대 대만에 들어갈 때는 오죽했으랴? 입국 시에 작성하는 양식에는 떠나는 비행기의 편명까지 기재하게 되어있었다.
편도로 들어와 불법 체류자로 눌러앉는 이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까지 떠나는 날을 물을 필요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내가 잠재적 불법 체류자로 분류되어 이런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건데, 나만 떳떳하다면 무슨 문제겠는가? 하지만 뭔지 모를 찜찜함이 계속되었고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해당 양식의 다음 문항에 있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나는 '무직'을 찾느라 여러 차례 위아래로 스크롤을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나를 정의하던 배경은 모두 사라졌다. 여행을 위해 신용카드와 체크카드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금껏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넘기던 백수가 되어 있었다. 입출국 수속 때, 카드 발급 시에 잠깐이지만 움칫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듯했다.
묘한 기분을 안고 입국한 타이베이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타이베이101 전망대에 올라가 보려 했는데 매표소 직원이 날씨가 좋지 않다며 101층까지 갈 건 없고 89층까지만 가면 된다고 했다.(101층까지 가려면 89층 보다 17천 원 가까운 돈을 더 내야 한다.) 양심적인 직원이 고마우면서도 101층에서 볼 거 없는 야경이 89층이라고 무엇이 대단히 다르랴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이틀 더 타이베이에 머무를 테니 연이 닿는다면 좋은 날 다시 돌아와 전망대를 즐길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 이사 가면 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물론 이는 이사 가는데 비로 망친 기분을 풀어주려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아무 근거 없는 이야기를 믿고 싶을 때도 있다. 애써 준비한 여정의 시작을 비와 함께 했다. 아마도 남은 일정이 수월할 모양이다. 근거는 없지만 그렇게 믿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