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2(D+75)_네팔/카트만두
ABC 이후 여러 가지로 개운치 않은 요 며칠이었지만 여행으로 만들어진 난국은 여행으로 헤쳐나가 보기로 했다.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돌아다니기 좋은 날이었다. 오늘은 계획을 조금 빡빡하게 잡았다.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 편이 잡생각도 사라지고 좋을 것 같았다. 카트만두는 흔히 쓰는 택시 앱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이동을 위해 오늘 아침 이름도 생소한 앱을 새로 다운로드했고 숙소를 나서자마자 앱을 가동하려 했다. 그런데 호텔 앞에 대기하던 기사 한 분이 접근했다. 그는 오늘 우리가 방문하고 싶은 곳을 모두 데리고 다니겠다며 흥정을 시작했다. 흥정 과정은 거칠지 않았다. 적당한 가격에 합의를 마친 우리는 첫 번째 목적지인 박타푸르로 향했다.
박타푸르는 오래된 고대 도시지만 그곳에 남아있는 유적들보다는 도시 전체에 그물처럼 뻗어있는 골목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택시 기사와 다시 만나기로 한 시각은 앞으로 2시간 후. 유적을 모두 돌아보는 데는 30분도 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남는 시간을 박타푸르의 골목을 돌아다니는데 투자했다. 이곳의 골목은 언뜻 보기에 바라나시와 비슷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달랐다. 우선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친근했다. 사진을 찍고 있으면 기다려줬고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면서도 경적을 요란스럽게 울리지 않았다. 소는 보이지 않았지만 개는 있었다. 하지만 개의 배설물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숨어서 볼 일을 보나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쓰레기 역시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각종 공예품 상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지만 호객행위 역시 없었다. 우리는 그저 따뜻한 햇살 아래 천천히 산책을 즐겼다.
박타푸르 다음에 찾은 곳은 파탄이라는 곳이었다. 박타푸르와 함께 번성했던 왕국의 도시 중 하나다. 이곳 역시 유명한 관광지인지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려 하니 가이드를 해주겠다는 사람들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들은 집요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어느 나라 출신인지 물었고 한국 사람이라 답하면 어색한 '안녕하세요'로 대화를 시작했다. 친절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가이드가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한두 차례 제안을 했으나 그 이상 따라붙지 않았다. 심지어 포기할 때는 좋은 하루 보내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원래 파탄까지가 택시 기사 아저씨와 약속한 일정이었는데 우리가 파탄을 모두 돌고 나왔을 때 그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짧게 경적을 울리더니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하려 했던 스와얌부나트 사원은 다른 택시를 이용할 생각이었지만 아침부터 함께 다닌 분이 기다리고 계시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적당한 금액에 사원에 들렀다 숙소까지 돌아오는 것을 제안했다. 그는 우리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본인이 원하는 바를 취했고 우리도 덕분에 마지막 일정까지 편하게 둘러보고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그래서 모든 것이 인도와 비교되었다. 이곳도 무단횡단과 경적 소리는 여전했지만 거칠거나 시끄럽지 않았고 골목길과 도로는 깨끗했다. 인도에서의 기억이 남아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두 경계했으나 그들 중 누구도 우리를 속이거나 갈취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접근은 하되 거절하면 조용히 웃으며 떠나갔다. 터무니없는 흥정도 없었다. 억지로 무언가를 주장하지 않았고 적어도 내 기준에서 합리적인 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겉모습이 인도 사람들과 닮아있어 이런 차이는 더 극적으로 다가왔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스리랑카를 착한 인도라 칭하는 것을 들은 적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와 네팔을 모두 거친 지금 나에게는 스리랑카보다는 네팔이 착한 인도에 가깝다. 내일은 착한 인도의 마지막, 다시 말해 네팔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모레부터는 착한 인도가 아닌 진짜 인도로 돌아간다. 착한 인도에서 진짜 인도가 떠올라 적응이 어려웠듯이 진짜 인도에서 착한 인도가 그리울 공산이 크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인도로 진격하던 그때의 우리가 아니다. 당할 만큼 당했고 쓴맛도 많이 봤다. 남은 2주 간의 인도 일정은 우리를 노리고 덤벼드는 그들의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다시 싸울 힘을 한껏 끌어모으기 위해 내일은 마지막 남은 착한 인도의 하루를 멋지게 보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