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한 번, 대치동이 멈추는 시간

프롤로그 대치동 밤 열 시

by 대치동 비둘기
빵빵!!!!!
빵~~~~~~~~!!!!



언제나처럼 하루 일과를 깨우는 알람 소리와 정반대로

하루 일과 마무리를 알리는 밤 열 시의 경적 소리

핸드폰이나 시계의 부드럽고 예상 가능한 알람이 아닌,

분주히 자녀를 태우고 귀가하기 위해 대치동 사거리에 모인 많은 차들의 경적 소리는

늘 일정한 시간에 대치동을 가득 채운다.



대치동의 밤

'우리 동네'

대학교 입학 후, 서울로 상경하여

자의반 타의반 거의 2~3년 주기로 이사를 해 온 탓인지

나에게도 몹시 낯선 그 단어



어느새 동네에 익숙해질 때쯤

그제서야 내가 사는 동네의 좋은 점과 안 좋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 때가 되면 문득 내가 떠나야할 이유가 생기고

마치 미련 없이 이별하는 사람처럼 뚝딱 이삿집을 싸고

또다른 동네로 이동하며 살아왔다.







사주에 역마살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있다고 했던가.

직장도 집도 꽤 남들보다 빈번한 주기로 바뀌었다.

직장은 1년에 한 번 내 공간과 짐을 옮겨야만 했고,

5년이면 그 학교에서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다른 기관으로 이동해야 했다.



집은 어쩌다보니 근무지에 맞춰

또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평균 3년 남짓의 간격으로 동네도 집도 바뀌었다.

그런 나에게 대치동은

의외로 다른 곳에서 이사해온 내가 조화롭게 지내고

그리 튀지 않으며 적당히 살아가기 좋은 동네이자

은근히 서로에게 거리를 두는

사생활을 존중해주는 편안한 동네이다.





가끔 나는,

아마도 나처럼 일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왜 나만 이렇게 바쁘고 분주한지

왜 여유 없고 정신없기만 한지

서글픈 피곤함을 느껴왔다.



여유로이 브런치를 즐기고,

취미 생활을 하며,

언제나 마음먹으면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 여유가

왜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학창시절부터 계속 되어 온 오전 9시부터 시작하는 삶이

아득한 정년 퇴직 기간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아득하게 느껴지는 터널 끝에 대한 무기력함과 불행함이 들기도 했다.



막상 요즘은 그런 일상이

그렇게까지 서글프다거나 불행함을 안겨주지는 않고,

때로는 행복감이나 이유모를 보람을 느끼기도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내가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거나

주변에 나보다 바쁜 사람들이 많다는 것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말이지 이제는 안 바빠도 될 것 같은

능력자들마저 나보다 더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무기력함과 불행함이 많이 줄었다.



그만큼 다들 열심히 살고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 대치동의 아우라

또다른 초조함과 불안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소한 일상들을 열심히 살고 있는 내 자신에게

소리없는 응원과 칭찬을 해주는 것만 같다.





"그렇게 안 봤는데, 애 잡으러 가나봐요."



대치동 이사를 결심하고 들은 많은 말들 중 하나는

'그렇게 안 봤는데' 교육열이 무척이나 높고 아이에게 엄청난 사교육을 시키며

경쟁의 가도를 어릴 때부터 달려가게 만드는 엄마냐는 질문이었다.

맞다고도 할 수 없고,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미묘한 질문과 분위기를

몇 번이나 마주하고 있노라면 대답해야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맞벌이니까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다."

라는 대답을 하곤 했다.



사교육 시장의 핵 그러니까 태풍의 눈처럼

학원가의 센터에 입성하겠다는

나의 가상한 용기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듯
우리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도 없다.

나는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고

아이가 길을 찾았을 때

가까이에서 지원해주고 싶어

대치동을 선택했다.


그것이 지금 학부모들이 가장 선망하는

의대 입학처럼 A코스가 아닐지라도

나는 아이가 원하는 것에 대한 정보가

가득한 곳에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골랐다.


사실은 사교육 시장을 잘 몰라

겁없이 이 동네에 들어오게 되었다.

정말이지 처음에는 계란으로 바위치는 기분을 느끼며

씁쓸한 패배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날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대치동의 밤하늘


나는 대치동에서 일반 유치원을 졸업해 공립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 하나를 키우는 학부모이자

선생님들 사이에서 악명높고 힘들기로 유명한

강남8학군 초등학교의 교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직업적으로 그어야 될 공적인 선

학부모들과 함께하면서도 슬쩍 그어야 할 사적인 선

만날 듯 만나지 않는 평행을 이루다

의도하지 않은 장소와 때에 겹쳐 나타나는 혼동에 익숙해지며

대치동에서 살고 있다.



그 선들로 만들어진 파장과 교차점들이

늘 아름답게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감정들이 아파트 화단의 꽃들처럼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며

대치동의 사계절을 무사히 보내고 있다.









어쩌면

나는 마치 문화재나 여행지를 구경하는 관찰자의 마음으로

대치동에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적극적으로 사교육시장에 아이를 내몰지 않았고

수능은 까마득한 이야기인 행복한 나이인 아이와

여기저기 둘러보고 남들을 관찰하며

보고 느끼고 살피며 기록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언젠가 이 글을 읽는

나이 지긋한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보다 조금은 더 편안하고 느긋하길 바라며,

그리고 우리 동네가 진짜 궁금한 누군가에게

사교육 시장의 한복판에 살아가며

어정쩡한 위치를 맴도는 회색 비둘기 같은 나의 관찰일지들이

편안하고 가벼운 여행기같이 쉽게 읽혀지고 잊혀지기를 바라며

마음 속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