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선사들은 국제 해상 항로 확보에 전례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홍해에서는 후티 반군의 공격 위험을 피하기 위해 수천 마일을 우회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흑해를 통한 곡물 운송이 위협받으며,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에서는 미·중 간 긴장 고조가 새로운 위험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급기야는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사상 최초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기도 했다. 21세기 글로벌 무역의 동맥이 곳곳에서 막히고 있는 것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한국 경제
전 세계 자동차, 전기전자, 화학, 섬유 등 대부분의 제조업은 원자재와 중간재를 국제 공급망에 의존하는 분업 체계 속에 있다. 원자재는 호주와 중동에서, 부품은 동남아와 중국에서, 조립은 베트남과 멕시코에서, 판매는 북미와 유럽에서 이루어지는 글로벌리제이션의 흐름 속에서 모든 제조업이 작동한다.
한국은 이러한 공급망 의존도가 특히 높은 나라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무역 규모가 100%를 넘는 세계 1위의 무역 의존국이다. 수출입 화물의 99.7%를 해상운송에 의존하고 있으며, 원유, 석탄, LNG, 곡물 등 에너지 및 전략 화물의 100%를 바다를 통해 들여온다.
구체적인 숫자로 보면 더욱 극명하다. 2023년 기준 한국은 원유 9억 배럴, LNG 4,600만 톤, 석탄 1억 2,000만 톤을 수입했다. 이 중 단 한 톤도 육로나 항공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희토류, 현대자동차의 배터리에 들어가는 리튬과 코발트, 포스코의 제철에 필요한 철광석 모두 배로 운송된다. 국민이 먹는 밀과 옥수수의 대부분도 마찬가지다.
안정적인 장거리 해상운송은 국민 생활의 풍요로움을 유지하고 제조업과 수출을 지속하기 위한 선결과제다. 그런데 이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변화하는 해양 안보 환경
해군은 지난달 창설 80주년 기념식을 갖고 강한 해군력을 다짐했다. 그러나 우리 해군은 아직 국적 상선대를 장거리 호송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구축한 ‘자유로운 항해 보장(Freedom of Navigation)’ 원칙 아래 해상운송을 해왔다. 미 해군의 압도적 전력이 공해상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 선박들은 그 우산 아래서 안전하게 항해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정책 변화와 전략적 우선순위 재조정으로 미국 주도의 해상 보호 체계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2기의 ‘미국 우선주의’는 동맹국들에게 더 많은 자체 방위 부담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 모든 해역에서 모든 동맹국의 상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가정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2024년 홍해 사태에서 미국은 ‘프로스페리티 가디언(Prosperity Guardian)’ 작전을 주도했지만, 참여국들에게 비용과 전력 분담을 강하게 요구했다.
현재 전 세계 어디에서나 자국의 에너지 수송선 등 상선대를 호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나라는 미국뿐이다. 그러나 중국, 러시아, 인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도 대양을 가로질러 일부 항로와 지역에서 자국 상선대를 호위하고 있다. 중국은 지부티에 해외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항공모함 전단을 인도양에 배치하며, 인도는 ‘인도-태평양 해양 안보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는 뉴칼레도니아와 레위니옹에 해군 기지를 유지하며 인도양-태평양 항로를 감시한다.
대양 해군, 경제안보에 필수
한국은 세계 6위의 무역국이며 주요 에너지원을 전량 해외에서 수입한다. 이에 걸맞은 대양 해군의 역량을 갖춰야 한다.
현재 우리 해군은 핵심 전투함인 구축함을 13척 보유하고 있다. 이지스 구축함 6척과 광개토대왕급, 충무공이순신급 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한반도 방위, 청해부대 소말리아 파견과 교대 임무에 투입되어 있다. 만약 남중국해나 인도양에서 위기가 고조될 경우 추가 파병할 여력이 거의 없다.
해군 전력을 확대하려면 구축함을 더 많이 건조하고, 경 항공모함도 확보해 우리 상선대의 공해상 운송을 보장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한국형 항공모함(CVX) 사업이 예산 논란 속에서 표류하고 있지만, 이는 단순한 국방 사업이 아니라 경제 안보의 핵심 인프라 투자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바다맹증’이라는 집단 착각
작년 미국에서 출판된 『ZERO POINT FOUR』는 미국 수출입 상품과 에너지의 90%를 해상운송에 의존하면서도 미국 상선대는 세계의 0.4%에 불과한 현실을 지적한다. 저자들은 일반 대중이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을 “미국이 바다맹증(Sea Blindness)에 고통받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수출입은 외국 선박을 이용하면 되지 않나요?”, “선박은 중국에서 싸게 건조하면 되잖아요?”, “공해상 운항 선박을 굳이 우리 해군이 보호해야 하나요?” 같은 질문들이 바다맹증의 전형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일부 선박 보험사들은 흑해 운항 선박에 대한 보험료를 10배 이상 인상하거나 아예 보험 인수를 거부했다. 화물은 있어도 배가 가지 않으면, 배는 있어도 보험이 없으면 운송은 멈춘다. 2023년 홍해 사태 때도 머스크, MSC 등 주요 선사들은 운항을 일시 중단했다. 외국 선박을 이용하면 된다는 생각은, 위기 상황에서 그 선박들이 한국 화물을 실어줄 것이라는 순진한 전제를 깔고 있다.
중국에서 선박을 건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선 기술은 이전할 수 있어도, 위기 상황에서 우리 배를 우선적으로 건조해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중국은 마스크와 방호복 수출을 일시 금지했다. 선박도 전략 물자화될 수 있다.
경제안보의 새로운 방정식
최근처럼 지정학적 갈등이 고조되는 시대에는 해군력이 우리 상선대를 보호할 수 있는지 여부가 제조업과 무역 유지, 나아가 경제 안보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정부는 2023년 「공급망 안정화 특별법」을 제정해 반도체, 배터리, 백신 등 핵심 품목의 공급망 안정화 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는 ‘무엇을’ 확보할지에 대한 답일 뿐, ‘어떻게’ 안전하게 운송할지에 대한 답은 아니다. 아무리 완벽한 공급망 지도를 그려도, 그것을 실어 나르는 바닷길이 막히면 무용지물이다.
국방부, 산업통상자원부, 해양수산부 등 관계 부처는 대양 해군의 역량 강화를 위한 중장기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군함을 더 많이 건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해군 전력 확충, 상선대 현대화, 선원 양성, 해외 항만 네트워크 구축, 동맹국과의 해양 안보 협력 등을 포괄하는 통합 전략이 필요하다.
바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그 바다가 위험해지고 있다는 신호는 이미 여러 차례 왔다. 이제 바다맹증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다. 경제 안보의 첫 번째 전선은 공장이 아니라 바다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