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애
내 어린 날 책읽기는 노란색 풍경이다.
4, 5학년 무렵 아버지가 사다 주신 세계 명작 동화, 그것의 표지가 모두 개나리색이었다. 아버지의 두껍고 큰 양장본 책들 사이에서 가지런히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책, 그것은 대부분 글줄에 그림도 거의 없었다. 겉은 약간 두껍고, 속은 재생 종이처럼 거칠고 칙칙했다. 하지만 그 책들은 어린 나에게 크기도 맞춤하고, 무게도 가벼웠다.
그것은 열기만 하면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마법의 문 같았다. 낯선 땅, 먼먼 곳에 버려진 소공녀 세라가 안타까워서, 엄마 찾아 길을 떠난 마르코가 불쌍해서, 부모 없는 아이의 설움에 나도 따라 울었다. 보물섬을 찾아 길을 떠나며 설레기도 하고, 괴도 뤼팽의 사건들을 지켜보며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친구들이 삼삼오오 마을을 누비며 뛰어놀 때, 나는 책 속에 빠져 들었다. 감나무가 내다보이는 작은 방에 앉아서 나는 책 속 주인공이 되어 여행도 가고 모험도 즐겼다. 기쁨과 슬픔을 그들과 함께 나누었다.
유년 시절 책읽기의 또 다른 기억은 빨간색 이미지로 남아 있다.
비닐 표지가 씌워진 아버지의 책들. 달과 6펜스, 돈키호테, 생의 한 가운데, 까뮈, 카프카, 헤밍웨이, 서머셋 몸……. 당시의 나로서는 발음도 어려운 책 제목과 지은이 이름이 책등에 작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그 책들을 읽으셨는지 모르겠다. K-2 군무원이셨던 아버지는 퇴근 후 식사를 끝내면 동생과 나의 숙제를 봐 주시고, 서류를 정리하거나 비행기 관련 책을 보셨다. 우리는 아버지 옆에서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그날 배운 내용을 공책에 다시 적고, 다음날 배울 부분들을 미리 읽었다. 두 팔을 쭉 펴고 30센티미터 이상 거리를 두고서. 그때도 책이 함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 시절의 책읽기는 새벽녘이나 겨울밤의 푸른빛으로 다가온다.
이른 아침, 혹은 늦은 밤, 버스를 타고 오가며 김동인의 ‘붉은 산’과 ‘광염소나타’를 읽었고, 노신의 ‘아큐정전’과 펄벅의 ‘대지’,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 윤동주의 <서시>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육사의 <청포도>와 김영랑, 이장희의 시를 읽으며 시인의 감성을 동경하기도 했다.
제 스스로 마음이 쫓기어 세상 모든 것들에 상처를 받던 때, 정답 없는 의문이 끊임없이 따라왔다.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느 누구도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못 해주던 그때, 묻고 또 물었던 것은 손에 잡히는 책들이었다. 날마다 허무의 밤이 저물고, 새 아침이 오기를 꿈꾸던 시절이었다.
20대의 책읽기는 뜨거운 여름날, 달걀도 익을 듯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검은색 느낌이다. 이외수의 ‘개미귀신’과 박일문의 ‘살아 남은 자의 슬픔’,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읽으며, 까닭 모를 슬픔과 세상의 부조리에 좌절했다. 이성이 메말라 갈라지는 느낌, 존재의 무상함에 영혼은 끝없이 흔들렸다. 비옥한 땅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싶었지만, 몰아치는 비바람에 마음은 부유물처럼 떠돌았다. 이 무렵의 나는 이청준의 <눈길>과 <이어도>를 읽었고, ‘당신들의 천국’에 비통해하며, 카프<KAPF> 문학 언저리를 기웃거렸다. 막걸리와 소주병이 나뒹구는 날들, 그런 날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책은 점점 멀어져 갔다. 한동안 내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30대에서 40대까지의 책읽기는 평범한 신입 사원이 차려입은 양복의 남색 느낌이 든다. 조금은 정형화되고, 조금은 경직된 책읽기, 어느 순간 나는 소설과 시집을 놓고, 그때그때 필요한 책을 여러 권 동시에 읽었다. 회사 일을 잘해 내려고 전문 서적을 찾아다녔고,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서 육아와 교육, 심리, 상담 책들을 골라 읽었다. 이때 읽은 비문학, 실용서들은 ‘살아남기 위해’ 혹은 ‘부모 노릇을 잘하고 싶어서’ 읽은 책들이었다. 그것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지식을 아낌없이 내어 주었다. 나보다 앞서 그 길을 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고충과 시행착오를 들려주었고, 세상 모든 문제는 피하지 않고 직시할 때, 해결이 좀 더 쉽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편견과 독선을 버리고 중용의 자세로 바라볼 것, 그런 삶의 태도를 이때 나는 경험과 책으로 함께 배웠다.
최근 몇 년간, 아파트내의 작은 도서관에서 봉사를 하면서 아이들과 같이 동요를 부르고, 동시를 읽는다. 책을 읽고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점점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향해 줄기와 가지를 뻗는다. 아기에서 어린이로, 어린이가 어른으로, 사회에서 제 한몫을 다할 때까지 자신의 뿌리를 깊이깊이 내린다. 그렇다면 사람은 저마다 씨앗이고, 풀이며, 나무다. 책 또한 누군가의 씨앗이고, 풀이며, 나무다. 그렇다면 도서관은 서로 다른 풀, 나무가 조화를 이루는 숲이다. 하나하나의 존재로는 그 향기가 약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싱그런 기운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내 인생 50대의 책읽기는 어떤 빛깔일까. 이제 막 시작이니 섣불리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가 읽고 쓰는 삶의 기록이 무지갯빛 찬란한 스펙트럼으로 빛났으면 좋겠다. 문화와 예술, 역사와 철학, 우주의 질서를 다룬 책들, 삶의 거름이 되고, 말과 행동의 자양분이 되는 책을 골라 읽고 싶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나’라는 나무는, 순환하는 사계를 따라 피고 지고 다시 피며, 마실 나온 이웃들 안부를 묻는, 고향집 마을 어귀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되고 싶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 나뭇잎 사이로 내리는 햇살을 당신에게 비추고 싶다.
<2019 제10회 달서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