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차 직장인의 커리어 중간 정리
얼마 전 브런치 글을 보고 연락이 왔다. 본인의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을 주제로 오디오 북형식의 강의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꾸준히 공부하고 글을 써오기는 했지만, 내가 하는 일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커리어의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 쉽사리 승낙을 못 했다.
근데 한편으로는, 이참에 나의 커리어를 정리해보는 것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다. 결국, 해당 회사의 제안을 승낙했고 그때부터 몇 주 동안 14강 분량의 강의 스크립트를 작성했다.
다 작성하고 나니, 이제 진짜 나의 커리어 1 Round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하반기 한화그룹 공채에 최종 합격하여 첫 출근을 여의도 63빌딩으로 했다. 처음 출근한 날의 감정을 잊을수가 없다.
금융 자격증, 학과 수업, 인턴 경험 등과 같은 유관 경험은 그저 내 이력서에 한 줄 적기 위한 알량한 타이틀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온 거품이 완전히 걷히고 진정한 내 실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압도됐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의 정말 얇은 한 가닥의 옷마저도 다 벗겨진 채로 홀로 여의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처음 몇 주간 경험해보니 대기업의 생활이 정말 맞지 않았다. 사실 대기업이 아니라 어떤 기업에 가도 마찬가지 였을 것 같다. 나는 나를 잘 안다. 인간 자체가 강한 사람이 아니라서 사소한 문제도 다 버겁게 받아들인다.
커리어 첫 목표를 3개월 버티는 것으로 설정했다. 누군가가 나를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극도로 예민한 상태를 유지했다. 밤에 잠자기 전 회사 생각이 나면, 평일이고 주말이고 아침까지 뜬 눈으로 있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고 나니, 동기들, 팀원들과 친해져서 그럭저럭 버틸 만해졌다. 그때부터는 처음과 같은 두려운마음은 사라졌지만, 길을 잃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대기업의 특성상 업무량 대비 인원이 많고 연공서열에 따른 업무 난이도가 극명했기 때문에, 일에서 어떤 성취감도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 회사에 모든 커리어를 걸어야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입사한 지 불과 1년 만에 이직을 결심했다. 그렇다고 거창한 커리어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다. 딱 5년만 미친 듯이 일해보자는 목표였다.
회계법인 재무자문 본부(주로 M&A, 재무실사, 가치평가 같은 일을 하는 본부)로 이직을 했다. 첫 출근을 하고 미팅을 하는 데 바로 프로젝트를 배정받았다. 한동안은 미팅 중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마디 하는 순간 나의 모든 바닥이 드러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회계법인의 조직 특성상 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전문자격증을 보유한 직원이 많았다. 그때 처음 느꼈다. 일할 때는 나이나 학교, 전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실력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나이 같은 걸 떠나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동경심이 들었고 동기부여가 됐다.
나는 프로페셔널 조직에서 지식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어디까지인지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
회계법인에서의 생활이 커리어 중 가장 몰입하며 일했던 순간 같다. 몇 주 동안 쉬지 않고 출근도 하고 새벽에 퇴근하고 그런 과정에서 실력이 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결국엔, 승진도 했다.
바닥을 보고 싶어서 미친 듯이 일했는데,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편해졌다. 그때 나는 깨달은 게 있다.
인간에게 원래 바닥 같은 건 없구나.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이겨내려고 하면 내 한계 같은 건 없구나. 내가 어떤 마음을 먹는지에 따라, 내 바닥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구나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나니 일이 수월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일이 수월하게 느껴지니 정체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낯설고 불편한 상황에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해왔기에 다시금 어려움에 던져지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주변 사람들은 이미 내가 짧은 시간에 이직했기 때문에 만류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정말 많은 고민이었다.
정답은 없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힘들어서 도망치려는 게 아니라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라면 가는 게 맞는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직하고 나서 한동안은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완전히 다른 환경에 자신을 노출하고 적응해 가는 과정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늘 해왔던 것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내가 해야 할 일에 몰두하게 된다. 심사역이라는 일은 하면 할수록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전문성이라고 할 때, 어떤 사람은 전문자격증이나 전문 지식을 이야기하지만, 전문성은 훨씬 더 넓은 개념이다.
전문성은 주어진 일을 할 때 어느 한 면만 보는게 아니라, 그 일 전체를 파악하고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심사역은 프로젝트 전체를 보고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직무 특성상 전문성을 기르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회계법인에서의 경험, 대기업에서의 경험, 커리어 동안 해왔던 모든 경험과 지식이 융복합되어 심사역 일을 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예전에는 막연히 느낌으로만 알아 왔던 일이, 이제는 그릴 수 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기회가 보이는 것을 보면 꽤많은 것을 쌓아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는 내 커리어의 1라운드도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다. 애초에 전체 커리어를 길게 잡지 않았기에 조금 이르지만, 1라운드의 마침표를 찍어야 다시 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내게 이 길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고 이런 일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과 가야 할 길이 있는 사람의 걸음걸이는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내가 걸어온 길을 오려는 이들에게 작게나마 표지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강의를 녹음했다.
내 마지막 강의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올린다.
제가 취업을 준비하면서, 높은 목표를 세우고 이를 준비할 때 주변 대부분의 사람은 비웃거나 부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스스로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애초에 가지 못하는 길인데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 지와 같은 의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의기소침해지는 순간에도 하루에 스스로 계획한 일을 묵묵히 해나가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만이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일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나만의 페이스를 찾으며 다시금 가야 할 길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강의를 들으신 수강생 여러분은 각기 다른 상황에 놓여 있겠지만, 무언가를 새롭게 듣고 배웠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해낸 것입니다.
제 강의가 어딘가로 가야 할 지 모르는 수강생분들의 커리어 패스에 작게나마 표지판이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이제 내 커리어 1라운드의 마침표를 찍는다. 종료의 공이 울렸고 다음 라운드 시작 휘슬이 불어졌다.
진심으로 가슴이 벅차다. 나는 내가 여기까지 올줄 전혀 몰랐다. 그냥 버티고 싸우고 견디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나만의 커리어 라는 게 생겼다.
이번 라운드도 절대 녹록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다시 또 마침표를 찍을 날이 올 것을 알기에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