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는다.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시간, 혹은 가장 치열했던 날을 떠올려야 할 것 같지만, 정작 내 마음 깊이 남아 있는 장면은 뜻밖에도 아주 조용하고, 아주 느렸던 시간이다.
군대에 있을 때, 나는 훈련 중 다리를 다쳐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수술을 받고, 깁스를 한 채 며칠이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세상이 멈춘 듯한 병실. 그곳에는 시간의 감각조차 흐릿해질 만큼의 침묵이 있었다. 당시 군대에서는 스마트폰이 허락되지 않았고, 전화 한 통 하려면 눈치를 살펴야 했다. 외부와 단절된 그 세계에서 나는 오롯이 나와만 함께해야 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를 붙잡아준 것은 책과 CD플레이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서점집 아들로 열몇 해를 자랐으면서도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은 기억이 드물었다. 늘 눈앞에 있었기에 오히려 낯설었던 책. 하지만 그 병실에서, 책은 단지 시간을 때우는 도구가 아니었다. 매일 아침, 오늘은 어떤 문장을 만날까 설레였고, 익숙한 페이지를 다시 펼쳐 곱씹는 일이 기쁨이 되었다. 음악을 틀어두고 한 줄 한 줄 따라가는 그 고요한 순간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 처음으로 집중했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나는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화려한 것들이 참 많다는 것을.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 요란한 소리, 멋진 풍경들. 분명히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지만, 마음까지 닿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나에게는 무엇이든 ‘의미’를 느끼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한 번 보고, 한 번 듣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바라보고, 다시 생각하는 그 ‘조용한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그것이 내 것이 된다.
그래서 여행을 가도,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맛있는 것을 먹은 뒤에는 조용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글을 써야 한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그 시간. 하지만 마음속에는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난다. 군 병실에서 느꼈던 그 고요처럼, 말없이 나를 감싸주고, 또렷하게 남는다.
어쩌면 인생에서 진짜 기억에 남는 순간은, 그렇게 아무도 보지 못한 ‘고요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지만, 나를 나로 만들어 준 순간들은 언제나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