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시킴
파키스탄의 깊은 빙하와 극지를 제외하면 최장거리를 이루는 비아포, 히스파 빙하 트레킹을 시작으로, ‘검은 자갈’이라는 카라코람 고속도로를 자전거로 넘고, 세계의 용마루라고 불리며 차마고도가 지나는 티베트 고원을 달려, 네팔에 당도한 원정대는 쉴 틈 없이 캉첸중가가 우뚝 솟은 인도의 시킴(Sikkim)으로 향한다.
시킴은 히말라야 산맥에 자리 잡은 내륙 인도 동부와 북부지역에 위치한 한 주의 이름이다. 왼쪽으로 네팔, 북쪽과 동쪽은 티베트, 동쪽으로는 부탄을 남쪽으로 서뱅골주로 이어져 있으며, 2011년 기준으로 610,577명이 거주하여 인도의 고아(Goa)주를 제외하면 최소인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시킴은 지리학적으로 어느 곳에 부러울 것 없는 지리적 다양성과 생물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데, 북서쪽으로 히말라야 산맥부터 남쪽으로 매우 더운 평야 지대까지 가지고 있어 부탄과 함께 다양한 동‧식물의 터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산악인들에게는 이 지역 북서쪽에 세계 3위봉, 캉첸중가(8586m)가 자리잡고 있어 어느 정도 익숙한 지역이기도 하다. 캉첸중가의 신성이 이 땅을 보살펴 주는 탓일까? 시킴 전체는 배율, 즉 ‘샹그릴라(또는 샴발라)’라고 알려져 있는 신비의 땅으로 여겨진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면 8세기 파드마삼바바(구루 림포체)가 불교를 이 지역에 처음 소개했으며 이 지역을 축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시킴은 우리 원정대에게도 탐험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문화, 역사, 종교적인 부분에서도 중요한 곳이었다.
시킴의 수도는 강독(Gangtok)이고 전통적으로 티베탄 렙차족과 미얀마계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네팔의 침략으로 네팔인들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으며 네팔어가 시킴의 주요 언어 중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다른 공식 언어로는 영어와 힌디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그 외 셰르파, 따망, 렙차, 티베트 등지의 11개 언어들이 존재한다.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농업과 관광업을 주로 하고 있으며 관광 및 산악 관련 사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 수준이나 규모는 아직 미비한 수준이다. 2014년 조사에 의하면 시킴은 인도의 주중, 세 번째로 작은 경제규모를 기록했다고 한다.
원정대는 밝은 가을볕이 내려쬐는 10월의 어느 날 네팔-인도 국경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네팔 남부의 덥고 습한 기후는 히말라야의 차가운 고요와 높은 고도, 춥거나 시원한 기후에 익숙했던 원정대에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카카비타(Kakarvita)에서 호탕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기던 원정대의 인도 대원 라주를 만나 그 끈적거림을 잊을 수 있었다. 이 카카비타-실리구리 국경은 네팔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릭샤를 이용해 국경을 건널 수 있는 재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의 탐사를 진행해온 지난 몇 달처럼, 시킴에서도 바쁜 일정으로 인도에 들어오자마자 캉첸중가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국경너머의 첫 번째 도시 실리구리를 지나 육삼(Yuksam)이라는 동네까지 따뜻한 찌야(밀크티) 한잔 여유롭게 마시지 못하고 달려야 했다. 창문 너머 보이는 자연의 변화와 좁은 산길, 오프로드가 머리카락 삐쭉 삐죽 세우는 긴장감이 시킴 원정 첫날을 가득 채웠다. 원정대는 한참을 달려 저녁 10시가 다 되어서야 육삼의 작은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해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탕싱을 지나 ‘선택적 고통’이 주는 행복으로
다음날 밝게 솟아 오른 태양처럼, 원정대 팀 모두가 오히려 기운이 솟아나는 듯 했다. 역시 산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파란 하늘과 짙푸른 녹색의 산등성이에 펼쳐진 온갖 꽃과 식물들이 멋드러진 배경을 만들고, 포근하게 불어오는 오선지의 바람에 숲 속의 작은 새들의 사랑노래가 음표가 되어 살랑살랑 흐르는 이 순간들은 한편의 뮤지컬 같다. 멋진 배우들이 이 뮤지컬을 노래하고 연기한다.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거친 삶을 이어가는 현지인들, 그리고 대자연을 찾아온 이방인이 만들어내는 환한 미소와 힘찬 발걸음은 영화 속 배우들 못지않은 열연이다.
뮤지컬이든 영화든 행복한 시간이 있고 긴장감이 고조되는 시간이 있듯, 탕싱(Thangsing)의 3841m 지점에 위치한 베이스캠프까지 접근하는 6일은 클라이맥스를 위한 준비 단계 같은 시간이었다.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무쌍한 자연 속에서 캠핑을 하고, 지평선에 걸린 캉첸중가 여신의 대저택을 바라보며 등줄기와 콧잔등에 쉼 없이 솟아나는 땀과 함께 걷는 것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불편 속 행복의 시간이었다.
변화하던 풍경은 점점 긴장감을 더 한다. 캉첸중가를 찾은 서양여자 트레커가 높아진 고도와 긴 시간의 산행에 지쳤는지, 햇살 아래 바위에서 졸린 병아리처럼 멍하니 앉았다. 탕싱을 지나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 캠프 사이트에 도착했는데, 더 높아진 고도와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하는 것이 선택적 불편의 단계를 넘어, 추위나 예상치 못한 자연요소에 몸을 상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사이 텐트 플라이를 쉬지 않고 흔들던 거친 바람이 잠시 잠든 이른 아침, 한국에서 가지고 온 육포며 아껴두었던 간식과 과일을 마련하여 산신령에게 우리 원정대의 안전과 성공을 기원하는 푸자(일종의 제사)를 하고 1캠프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틴친강 1캠프(4310m)로 나서는 인원은 전체 일행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는데, 결빙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짧지 않은 암벽 구간을 지나야하기 때문이었다. 가이드는 짐 메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고 고소포터 2명이 7명의 짐을 다 짊어 질 수 없었기에, 박정헌 대장과 나는 엄청난 양의 배낭을 메고 올라가야 했다. 고소등반이 활성화 된 네팔이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5시간의 오름짓으로 도착한 캠프사이트는 3~40도 정도 기울어진 설사면, 주위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더 좋은 캠프사이트가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피켈로 열심히 눈을 사각으로 찍어 들어내고, 캠프사이트를 구축하기 위해 평평한 장소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눈과의 전쟁을 치렀을까. 두 시간? 세 시간? 점점 그럴 듯한 공간이 나왔고 텐트를 펼칠 수 있었다. 설상 구간이라 텐트 팩을 대신하여 미리 꺾어온 대나무와 피켈 등을 이용하여 텐트를 고정하고 캠프사이트 구축을 마무리하였다. 텐트 안에 지친 몸을 뉘었더니 세상 어느 것도 부럽지 않다. 찌든 세상으로부터의 선택적 고립은 순백의 눈을 닮은 명상의 시간이 된다고 해야 할까? 히말라야의 깊은 산 속, 그리고 그 속에서도 더 깊은 이 눈 위의 하루는 황홀한 순백의 고요로 평생 기억되리라.
반면, 텐트 안에 들어왔다는 행복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고산이 처음인 라주는 심각한 두통과 체력저하로 1캠프에 도착하고부터 거의 초주검의 상태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하나, 침낭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박정헌 대장과 내가 가져온 모든 자켓과 옷들을 라주에게 내줘야 했다. 히말라야 5천 미터 설사면 위에 찾아온 어둠의 시간은 감당하기 힘든 추위와 함께 왔다. 아무리 보온성이나 기능이 좋은 옷을 겹쳐 입는다고 해도 침낭 없이 보내는 하루는 평생 겪기 힘든 악몽이었으리라.
그 악몽의 시간동안 박정헌 대장은 매시간 일어나 따뜻한 물을 끓여 주며 힘들어 하는 라주를 돌보았다. 박정헌 대장이 물을 끓이는 소리를 듣고도 다음 날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혼자만을 위한 잠을 청한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그 당시 계속 된 산행과 추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조금은 힘을 보태어 볼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오랫동안 내 마음을 괴롭히리라. 한편으로는 박정헌 대장이 대원을 챙기는 그 모습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짙푸른 새벽 어둠 속 헤드랜턴에 의지해 차가운 이중화를 신으며 결전의 날을 맞이한다. 1캠프에서부터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올라가야 하며, 정상까지 약 3~4시간은 경사가 가파른 설사면이나 암벽구간이 있어 기술적인 등반이 요구되었다. 다행히 어제의 좋지 않은 몸 상태가 밤을 지나며 많이 나아져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오로지 피켈과 내 두 발에 의지해 올라가는 설벽은 측정 못할 긴장과 끊이지 않는 헐떡거림으로 내 폐를 파고들었다.
원정대의 주된 목표는 틴친강 정상에서의 비행이었다. 원정대는 설사면을 따라 한 시간을 넘게 한참을 올라가며 상황파악에 집중했다. 정상까지의 거리와 소요시간을 고려하고, 앞에 보이는 산봉우리에 패러글라이더 비행에 적합한 공간의 여부, 바람의 적기 등을 바탕으로 판단했을 때, 전체적인 상황들은 정상에서 비행을 하기 어렵겠다는 결정으로 우리를 몰아갔다. 그래서 박정헌 대장은 정상으로 가는 길의 설사면에서 비행을 시도했다.
우리 모두가 패러 비행과 촬영을 위해 올라간 새벽, 라주는 텐트에서 조금의 수면을 더 취하고자 했고, 길을 나선 나의 침낭 속에서 아주 짧지만 ‘꿀잠’을 잘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라주의 상태는 여전히 몇 일째 계속된 산행과 고소로 내려갈 힘도 올라갈 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시킴의 관광성 및 여러 단체 등의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걸어 내려간다고 해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기에 패러글라이더로 하산하기로 마음먹었다. 1캠프는 가파른 설사면이라 패러글라이더를 펼 수 있는 공간이 나오지 않았고, 한 발자국의 도약만이 겨우 허락하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전진하여 뛰어 나간다면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에 뛰어드는 격이었으니, 그의 고민은 저 앞의 크레바스만큼 깊지 않았을까?
한편, 박정헌 대장의 이륙도 결코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경사진 설사면에 자꾸만 미끄러지는 패러글라이더를 몇 번이고 다시 펴고, 재킷 사이를 파고드는 한기에 체온이 식어가는 고통을 다스리며 바람의 때를 기다리는 것. 히말라야에서의 이 비행 역시 산신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해 보였다.
박정헌 대장의 기다림을 보며 다시 한 번 히말라야에서 갈고 닦은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저 상황이었으면 과연 저렇게 고요히 기다릴 수 있었을까?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추위와 기약 없는 기다림에 당황하여 자칫 실수할 수도 있을 텐데, 박정헌 대장은 그저 고요히 기다린다.
그 때였다. 바람의 신 인드라가 오랜 기다림에 반응했는지 신호를 주었고, 박정헌 대장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멋진 도약으로 잡아냈다.
끼얏호! 이 한 마디가 이제까지의 기다림을 털어내며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음을 명백히 느끼게 한다. 박정헌 대장의 파란 패러글라이더는 짧지만 강한 한마디를 남기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구름 속으로 사라져갔다.
캠프에 있던 라주는 텐트를 철수하고 좁은 캠프사이트에서 몇 번의 목숨을 건 비행을 시도했다. 비행 아니면 죽음이라는 각오로. 라주도 생명의 위협을 이겨내고 이륙 성공! 무전으로 들려오는 그의 상황에 얼마나 가슴 졸였던지…….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니 긴장감이 손바닥을 스쳐온다. 시킴에서는, 아니 인도인으로서는 이런 패러글라이더 시도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우리 원정대원 라주의 주가가 급상승하는 순간이었으며 그의 패러글라이더 커리어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순간이 되었다.
이 순간은 '인샬라', 신이 우리를 허락했기에 가능했다.
원래의 계획대로였다면 박정헌 대장의 비행을 촬영하고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함께 온 가이드들이 시간도 충분할 것이라며 정상으로 가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계획대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 멀리 인도, 시킴 캉첸중가의 품속에 와서, 바로 앞에 있는 정상을 한번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냥 내려간다면 평생의 후회로 남지 않을까? 조용히 생각해 본다. 우리 원정대가 오기 며칠 전에 다른 원정대가 정상을 다녀갔으니 고정로프에 대한 부담감이 없는 상태이고, 가이드 2명중 한 명이 이미 정상경험이 있다는 것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예상보다는 늦게 본대와 합류하겠지만 정상 등정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을 내렸고, 가이드 2명과 정상을 향했다.
피켈을 설벽에 꽂으며 몇 번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티베트에서 5천 미터 고도에는 완전히 적응해 이 정도 고도에서의 등반은 그리 힘들지 않을 거라는 어설픈 짐작은 나의 오산이었다. 첫 번째 설벽 구간을 지나자 바위 구간이 나타났다. 아침부터 박정헌 대장의 비행 촬영을 위해 얇은 장갑을 끼고 있던 탓 일까? 피켈을 쥐어진 손에 힘이 잘 안 들어가며 불안감이 온몸을 스친다. 바위틈에 건 피켈이 떨어지거나 얼어 감각이 둔해진 손이 피켈을 놓친다면, 나는 몇 십 미터 밑의 눈과 얼음에 파묻혀 원정대의 큰 짐이 될 것 같다는 걱정이 저절로 들었다. 큰 짐의 범위를 넘어 심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변태 같은 생각도 들었다. 왜 수많은 등반가들이 손가락을 잃었는지. 아마, 그들은 그들의 손가락과 아무나 쉽게 느끼지 못할 이 대자연 속의 숨 막히는 짜릿함과 자신의 몸을 바꾼 것은 아닌가 하고.
정상을 향해가는 이 시간, 산 선배들의 경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내게는 이 짜릿함이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물론 손가락은 너무나 시렸지만. 약 3시간의 등반 이후, 나는 틴친강(6010m) 한국 초등자가 되었다. ‘상황이 좋았다면 원정대 전체가 얻었을 수식어인데’하는 아쉬움과 하산에 대한 걱정으로 정상에서는 몇 분을 채우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캉첸중가를 품고 비행에 성공한 박정헌 대장과 라주는 탕싱의 비교적 평평한 곳에 안전히 내렸고, 트레킹을 위해 이곳을 지나던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심지어 며칠 코스가 차이 나는 다른 곳에서도 하늘을 수놓은 패러글라이더에 환호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내가 포함된 그룹 역시 본대와 만나 전 대원의 성공을 축하 할 수 있었다. 캉첸중가와 바람의 신 인드라가 우리 원정대의 기원을 들어 주었기에 가능했던, 그야말로 판타스틱한 하루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원정기간 중 여러 나라와 지역을 돌아 다녔지만, 시킴은 그 중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이 아닌가 한다. 히말라야 산맥 동쪽, 캉첸중가를 시작으로 한 웅장함과 대자연의 아름다움, 아직은 때 묻지 않은 시킴 사람들까지. 도로 개발 및 교통의 발전과 더불어 산악문화를 키우려는 여러 젊은 친구들의 열정까지 더해져, 곧 시킴 산악계의 르네상스가 찾아오지 않을까 예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