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가린 게 아니라, 나를 지키기 시작했다

북커버를 사다.

by 서대희



작년 잠시 만났던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 친구에게 서로 책얘기를 하다 이런 말을 했었다.


“넌 책 읽는 느낌을 아는 사람 같아서 좋아.”


일종의 호감 표현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다 들어가지 않는 핸드백에 기어이 책 한 권을 넣어두고,
가끔씩 생기는 찰나의 여유 속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꺼내 읽을 줄 아는 마음.

얼마나 읽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 책을 펼치는지에 대한 감각.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사람은 대체로 호감형으로 남는다.

조용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시기가 있었다.

작년엔 책을 꽤 많이 읽었다.

읽고 있는 책을 사진으로 남기고, 밑줄 친 문장을 공유하고,
때로는 아무 의미 없이 표지만 올리기도 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


‘이 정도는 읽는다’는 사실과
‘이 정도는 생각한다’는 분위기.

그때의 나는 읽고 있는 책을 기록하는 일이 좋았다.

그 안에 담긴 문장과 생각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고,

어쩌면 그런 나를 보여주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책을 기록하고 나누는 방식은 누군가에게는 좋은 습관일 수 있다.






요즘은 그 방식이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책은 곁에 두고 다니지만 그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현장이나 사무실에서 잠깐의 틈이 생기면 습관처럼 책을 펼치게 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무슨 책이에요?”

“재밌어요?”

“내용이 뭐예요?”


질문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관심에서 시작된 말들이지만 그 질문에 대답을 이어가다 보면
책을 읽고 있던 시간이 어느 순간 설명의 시간으로 바뀌어 버린다.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이야기는 책이 아니라

그 책을 읽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방향을 가진 사람인지.


책은 점점 내용이 아니라

사람을 가늠하는 도구처럼 다뤄진다.

그 경험이 몇 번 쌓이고 나니
이상하게도 취향을 드러내는 일이 조심스러워졌다.

좋아하는 문장을 말하는 것도,
읽고 있는 책을 밝히는 것도
괜히 설명이 따라붙을 것 같아서

잠깐 망설이게 되는 순간들이 생겼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펼치면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집중은 이미 끊겨 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 이건 읽는 시간일까,
아니면 보여지는 시간일까.




그 질문을 한 뒤로

책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그래서 책커버를 샀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표지가 보이지 않는

아주 평범한 커버.

제목도, 디자인도 모두 가려진다.

누가 보기에
그저 ‘현장 노트’ 하나 들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그 단순한 변화가
생각보다 많은 걸 바꿔 놓았다.

누군가 묻지 않아도 되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읽는 행위만 남는다.

책을 펼치는 순간이 다시 조용해졌다.


돌이켜 보면 책을 가린 게 아니라
시간을 드러내지 않게 된 것에 가까웠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그 시간만큼은
설명 없이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


나에게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내 안으로 무언가를 들여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로 꺼내지 않아도 그대로 쌓여도 되는 것들.


KakaoTalk_20260323_190035840.jpg 심플 하지만 좋다




그래서 이제는

읽고 있다는 사실보다
읽고 있는 순간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덜 보여주고,
덜 설명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조금 더 깊이 남는다.

책커버 하나를 씌웠을 뿐인데
독서의 방향이 바뀌었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이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생각보다 단단하다.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그걸 굳이 증명하지 않으려 한다.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서
비로소 남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조용히 책을 읽는다.


아마도 나는

이제야 제대로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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