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보다 구조의 문제를 봐야 하는 이유
누군가는 “원래 관심이 덜해서”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실력이 있으면 결국 올라온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들이 현실을 너무 게으르게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여성이 기술을 못해서도 아니고 기술을 싫어해서도 아닙니다.
문제는 기술 업계가 오래전부터 특정한 인간형을 표준으로 삼아 설계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기계를 만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경쟁적 분위기에 익숙하며 긴 노동시간을 감당하고 공격적인 토론 문화에도 쉽게 상처받지 않으며 돌봄과 생애주기의 부담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
이 표준은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편향된 기준입니다.
흔히 “여성 지원자가 적다”고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성이 덜 지원하도록 만들어진 환경이 먼저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학교에서부터 그렇습니다.
이공계와 코딩은 여전히 많은 사회에서 남성적 이미지로 소비됩니다.
잘하는 여자아이는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잘하는 남자아이는 “재능 있다”는 평가를 받는 순간부터 이미 서사가 갈립니다.
한 사람은 꾸준함으로 설명되고 다른 사람은 천재성으로 설명됩니다.
이 차이는 진학과 커리어 선택에서 꽤 오래 따라붙습니다.
산업 현장으로 들어오면 문제는 더 노골적이 됩니다.
기술 업계는 실력주의를 강조하지만 실제 운영 방식은 완전히 실력주의적이지 않습니다.
채용은 네트워크를 타고, 성장은 멘토를 타고, 리더십은 가시성을 탑니다.
그런데 네트워크, 멘토링, 가시성의 구조가 오래도록 남성 중심으로 형성돼 있었습니다.
여성은 입장권을 얻는 것보다 입장한 뒤에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과정이 더 어렵습니다.
AI 업계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미래 산업이고 혁신의 언어를 쓰지만 실제로는 기존 기술 업계의 권력 구조를 상당 부분 이어받았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이 여성의 AI 전문 인력 비중을 22% 수준으로 보고, STEM 임원에서 여성 비중이 12%대라고 짚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즉, AI가 새로운 산업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새로운 문화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기술은 미래지향적일 수 있지만 조직은 놀랄 만큼 과거지향적일 수 있습니다.
한국은 이 문제가 더 압축적으로 보이는 곳입니다.
OECD는 한국의 여성 ICT 전문가 비중이 13% 수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수치는 취향 차이로 보기 어렵습니다.
한국의 노동문화는 여전히 장시간·고가용성·비공식 네트워크 의존이 강하고, 돌봄 부담의 분배도 충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성은 기술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실력 외의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하게 됩니다.
능력의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버텨낼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시험까지 치르는 셈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숫자의 문제이기 전에 상상력의 문제라고 봅니다.
어떤 산업에 여성이 적다는 것은 그 산업이 아직도 “누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인가”를 좁게 상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술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기술을 만드는 사람의 구성이 편향돼 있다면 그 기술은 결국 세상을 넓히기보다 기존 질서를 복제하게 됩니다.
AI가 편향을 학습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데이터가 과거를 닮았기 때문이고, 조직이 권력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 업계는 왜 아직도 많은 여성에게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느끼게 만드는가?”입니다.
산업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문화는 설계될 수 있습니다.
채용 문구 하나, 회의 문화 하나, 평가 기준 하나, 육아와 돌봄을 대하는 방식 하나가 모두 누군가의 진입 가능성을 바꿉니다.
여성이 많아져야 해서가 아닙니다.
좋은 기술은 더 다양한 현실을 이해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은 도덕의 장식이 아니라 기술 품질의 변수입니다.
기술은 미래를 만든다고 말하지만 그 미래를 만드는 방에 누가 들어와 있는지를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자동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성을 더 배려하자” 수준으로 접근하면 절대 안 풀립니다.
그건 구조 문제를 태도 문제로 축소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건 기술 산업이 무엇을 실력으로 인정하고, 어떤 삶의 조건을 정상으로 간주해왔는지 다시 묻는 일입니다.
앞으로 AI 시대의 경쟁력은 모델 성능만이 아니라 누가 그 모델을 만들고 어떤 인간 경험이 그 안에 반영되는가에서 갈릴 것이라고 봅니다.
여성이 적은 기술 산업은 현실을 절반만 이해한 채 미래를 설계하는 산업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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