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를 열어가며 살아간다는 것_양자역학과 존재의 철학
우리는 모두 상자 안에 있다.
삶이라는 상자. 미래라는 상자. 선택이라는 상자. 그리고 때로는 마음이라는 상자 속에.
그 안에는 '살아 있는 나'와 '죽어 있는 나'가 동시에 존재한다. 어떤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고, 어떤 가능성은 이미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것이 결정되었는지조차 모른 채 하루를 살아간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관측되기 전까지 어떤 상태도 확정되지 않는다. 고양이는 죽었고 동시에 살아 있다. 우리가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그것은 단지 물리학의 개념이 아니다. 나는 이 철학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설명해 준다고 믿는다.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상자를 열고' 있다. 한 사람을 마주하는 순간, 한 가지 선택을 하는 순간, 혹은 어떤 풍경을 바라보며 나를 다시 바라보는 그 순간 — 우리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 속에서 하나의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 현실은 우리에게 우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의식과 관찰, 그리고 존재의 집중이 만들어낸 흐름이다.
여기서 나는 불교의 '열반'이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열반은 단순히 죽음이나 소멸이 아니라,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해탈의 상태다. 고통은 집착에서 오며, 집착은 '확정된 무언가'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양자역학처럼, 삶은 끊임없이 진동하고 흐르며, 결코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확정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곧 우리의 고통이다.
열반의 상태는 '불확정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억지로 살리거나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 확정하려 하지 않고, 흐름 속에서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열반의 평온이다.
도가(道家)의 관점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도는 인위가 아닌 자연의 흐름을 말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 억지로 만들지 않고, 억지로 결론짓지 않고, 흐름 속에서 그대로 존재하는 것. 상자를 열든 열지 않든, 존재는 스스로의 길을 간다. 그것을 도라 한다.
이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어쩌면 상자를 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상자 안에서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상자를 여는 것에 몰두하지만, 누군가는 상자 안의 풍경을 더 깊게 바라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관찰하고, 다시 살아간다.
그렇다면 진정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관찰하는 나'일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놓아주는가. 열반은 그 놓음 속에서 오고, 도는 그 흐름 속에서 흐른다.
우리는 매일 상자를 연다. 관계 속에서, 선택 속에서, 감정 속에서, 기억 속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 동시에 죽은 채, 동시에 살아 있는 채.
그 모순 속에서 평온을 찾고자 하는 사람. 그 혼돈 속에서 길을 느끼는 사람. 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 존재의 고요한 이름을, 나는 오늘 이렇게 적는다.
— 살아간다는 것.
— 관측된다는 것.
— 놓아준다는 것.
— 그리고 다시, 사랑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