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한 내용에 대해 상사가 자세히 피드백을 주지 않는 것은 대체로 '통째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나 진배없다. 이때 공 들여 작성한 자료가 아깝다고 어떻게든 기존 껏을 수정해서 다시 써먹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결국 상사는 수정본을 실컷 누더기로 만들고 난 뒤에야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댕굴씨, 이거 아예 다른 방법은 뭐 없을까?"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이었다. 열심히 유행을 공부했지만, 이는 쓸모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타이밍.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지시하지도 않으면서 일단 '새로운 거, 재밌는 거'를 외치는 내 머릿속 상사에게 더 이상 벤치마킹 자료를 들이밀어서는 안 되었다.
아무튼 나는 괜히 이것저것 시도하다 이미 얇은 지갑마저 누더기가 되기 전에 유행하는 취미와 대세 커리어에 대한 나의 리젝 사유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캠핑은 사전 준비와 뒤처리가 스트레스였고, 골프는 배우고 즐기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비쌌다.프런트보다는 천상 백오피스 체질인 나에게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나 자신을 영업해야 하는 유튜버도 제2의 커리어로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
아예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원점으로 돌아와 머릿속 상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현 상태에 대한 불만(혹은 불안)의 시작은 '저녁 먹고 할 게 없다'는 것. 여가 시간이면 넷플릭스, 유튜브, 웹툰 등 무궁무진한 콘텐츠들을 보고 있으니 문자 그대로 '할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보는 동안엔 즐거운데 보고 나서 찾아오는 허무한 감정이었다.
순간의 재미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탈함. 앞으로 남은 인생도 이런 일상의 반복일지 모른다는 막연함. 이대로 정체되어 버린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저녁시간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원인에 다다르자 마음 한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던 감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젊은 날의 원동력이었던 성취감.노력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는 근십 년의 직장생활동안 아슴프레 잊혀졌던 그 감정이 순간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렇다면, 현 상태에서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건 뭘까?
대학원? MBA? 이직? 부업? 사업?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심지어 현상유지를 선택하더라도 답은 하나였다.
영어실력이 필요하다. 아이돌도 보면 영어 잘하는 멤버가 꼭 하나씩 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여도 영어가 어느 정도 돼야 헐리우드로 제2의 배우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회사들은 유창한 영어 실력을 필수 요건으로 꼽고, 탑티어 대학원이나 해외 MBA도 1차 필수 제출서류로영어성적을 요구하니 인생의 선택지를 넓히려면 영어는 필수였다.
에잇 젠장, 이노무 영어!!
원치 않았던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분했다. 고등학교 때도 끊임없이 날 괴롭힌 영어라는 놈이 취업할 때는 토익으로, 승진할 때는 오픽으로 애를 먹이더니 이제 원하는 것 좀 해보겠다는 데 또 이렇게 발목을 잡는다. 결판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취감에 불을 지피는 데에는 승부욕만한 것이 없다.
고3 때 진학할 전공을 고민하며 제일 먼저 정한 기준이 '영어를 많이 쓰지 않는 학과'일 정도로 영어를 싫어했다. (MSG가 아니고 진짜다. 그래서 경영학과는 아예 재껴두고 전공을 선택했다.) 평생을 원수처럼 여겼던 영어라는 놈을 앞에 두고, 이제는 무료한 일상에 불을 지펴줄 구원투수로 보고 있다니.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다들 퇴근하고 뭐하세요?'라는 질문을 야심차게 던져 놓고 정작 본인은 영어공부를 하겠다는 싱거운 결론이다.영어공부하겠다는 말을 어지간히 길게도 주절댔다.
원래 공부하기 싫을 때 책상 정리를 하는 법이다.
오늘부터 영어 공부 1일이라며 책을 폈는데 막상 오랜만에 공부를 하려니 굉장히 하기 싫다. 책상에 앉은 적이 없어서 책상 위에 정리할 것도 없다. 그래서 머릿 속이라도 정리해봤다.
영어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살면서 수없이 했지만이번처럼 자발적이었던 적은 없다.글을 쓰며 머릿속을 정리한 덕분인지, 아니면 영어가 재밌어질 정도로 무료한 저녁시간에 질려버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공부할 마음이 든 것 자체가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