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생과 결혼했다
#19. 혼자 살아가는 중입니다
빈센트 반고흐처럼 나도 테오 같은 동생이 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지만 백수인 나와 달리 그녀는 공간정보 데이터 전문가로 고급인력이다.
그동안 날 키운 건 9할이 동생이다. 난 동생 덕분에 온실 속 화초, 아니 비닐하우스의 잡초처럼 살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유일한 독자였고 신랄한 비평가였고 나의 든든한 지지자였고 믿음직한 보호자였다.
나만 믿어! 날 남편으로 생각해!
그래, 난 부모 복 없고 남편 복은 없지만 동생 복은 있다.
동생은 IT 중소기업에서 15년을 근무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권고사직 당했다. 직속상사인 나르시시스트 상무 덕분이었다. 그 상무는 지난해 초 동생이 낸 기획안을 보고 자기 밑으로 오라 한 인간이었다. 동생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 인간 밑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같이 1,2년 있다 퇴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 상무는 잘 지내다가도 뭐 하나 트집거리가 생기면 바로 "걔 자를 방법 없어?"라고 말하는 인간이란다. 약자에겐 한없이 지랄맞고 강자에겐 한없이 굽실대는 한마디로 쓰레기란다.
동생이 싫다고 하자 상무는 그럼 난 사장한테 말해서 널 어떻게든 내 밑으로 오게 할 거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내 밑으로 오면 난 단단히 삐져서 우리의 관계가 아주 불편해질 거다,라고 했단다. 동생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상무는 자기한테 복덩이가 왔다며 헤헤거리고 다녔다. 동생의 꼼꼼한 일처리에 탐복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동생이 실수(?) 하나를 했단다. 성과물 하나를 놓치고 있다가 뒤늦게 알아채고 일에 착수한 것이다. 하지만 별문제 없이 기한 내에 처리해 납품했단다.
하지만 상무는 성과물 체크를 제때 하지 못한 것에 단단히 화가 나서는 동생을 닦달하기 시작했단다. 그전에는 꼼꼼하게 일을 체크한다고 칭찬했던 것을 그 일 이후로는 사사건건 왜 시비를 거냐고 갈궜단다. 그리고 그전에 동생이 수행했던 일들을 마치 다른 부하여직원이 다 한 것처럼 "네가 한 게 뭐가 있냐!"는 식으로 동생의 실적을 부정했단다. 그리고는 대놓고 동생의 부하여직원과 일을 분리시키고 그 여직원과만 둘이 따로 회의를 했단다. (그 여직원은 동생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데다 곰 같은 동생과 달리 여우과다.)
상무도 자기의 행동이 문제소지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건 직장내 따돌림이 아니라 내가 너 배려해서 일을 분리한 거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더란다.
그 인간이 한 행동중에 가장 최악인 건 다른 임원들에게 동생이 사사건건 시비조고 부서장감은 아니라는 등의 욕을 하고 다닌 것이다. 결국 그 말은 사장의 귀까지 들어갔고 쓰레기 상무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사장 놈도 "그래? 그럼 걔 짤라!" 이랬단다.
동생은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도 쓰레기 상무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걘 세 모녀 가정의 가장이니까. 여자 나이 오십에 이직은 아무리 능력자라도 힘든 세상이니까...
쓰레기 상무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그 인간이 사과한 것도 정말 미안해서가 아니라 면피용이 틀림없다. "그래, 나 때문에 니가 짤렸지만 난 분명히 사과했다!"
동생은 2월에 퇴사한다.
퇴사라 쓰고, 권고사직이라 읽고, 잘렸다, 말하는.
15년 동안 동생은 그 회사에서 미련하게 일만 했다. 동생이 거쳐갔던 상사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기획안을 무시했다. 그 사이 다른 회사서 동생의 아이디어와 같은 플랫폼을 개발해 대박을 냈다. 그걸 본 사장이 그랬다더라. 우리 회산 왜 저런 거 못 만들어? 멍청한 새끼! 기획안 깔 때는 언제고!
동생은 말한다.
"내가 남자였어도 그런 대접을 받았을까? 전에 있던 부서의 여자상무도 똑같이 일했는데 개발자 남자직원은 이사로 승진시켜 주고 난 부장으로 남겨뒀어. 내가 공공기관 승인을 받아내지 못했으면 개발도 못했을 일인데 말이야!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의 문제야! 성차별이라구!"
난 동생에게 말했다.
너의 실력을, 너의 능력을, 너의 기술을 믿으라고...
차마 날 믿으란 소리는 못하겠다. 나도 날 못 믿겠으니까. 그래서 슬프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