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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신돌이 Jul 23. 2021

흥청이에게

#16.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흥청이에게          


흥청아. 네가 엄마 뱃속에서 “으앙!”하고 나왔을 때 좀 미안한 말이지만 ET 인줄 알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하고 넌 뒤집어진 벌레처럼 바둥거렸지. 그런 네가 먹고,자고,싸고, 울어대기만 하더니 금 새 포동포동한 새끼 돼지가 되더구나.      


우리  흥청이 세 살때 ‘삐뽀삐뽀 119’ 책을 들여다보며 “토끼 똥!” “염소 똥!”을 외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만 네가 의사가 되려나보다,  했더랬다. 넌 마치 내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한글을 깨친 후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직접 골라 혼자 읽기도 했더랬지. 난 '얼씨구나', 하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빌려다 날랐지.  속으로 '그래, 울  흥청이  의대  가자!' 외치면서 말야.

.      

우리 흥청이 여덟 살때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영어학원에 다니겠다, 했지. 속으론 '겨우 1학년이 뭔 놈의 영어학원?' 했지만 지가 하겠다는데 뭐, '절시구나 '했더랬다.  넌 학원 다닌지 3개월도 안돼 내 발음 구리다고 지적질을 해댔지. 내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리~ 쪼깐한 게 얼마나 배웠다고!


그렇게  넌 뽐내며 공부를  해대더니 5학년이 되서는 갑자기 학원을 그만두겠다, 수학 때문에 중학교를 안가겠다 폭탄선언을 하더구나.  세상에나! 열 두살 수포자라니. 내가 중학교는 의무교육이라 안 다니면 네 부모 잡아간다니까 그럼 중학교까지만 다니고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후우~ 어렸을 때 공부 잘하면 뭘 하니, 커서는 헛소리만 해대는 걸.      


한순간 '공포자(공부 포기한 자)'가 된 넌 별안간 빠순이가 되더니  "울 오빠들"을 외치며 아이돌 덕질에 시간과 돈을 쏟기 시작했지. 포카 모은답시고 똑같은 앨범 예 닐 곱 개 사는 건 기본이고, 이 코로나 시국에 생파 간다고 홍대 카페를 밥 먹듯이 다니더라.

넌 주인공도 오지 않는 생파 가서 7천 원짜리 쿠키 사고 “울 오빠들!” 사진이 들어간 컵홀더만 잔뜩 들고 오더구나. 나한테 욕 먹으며 돈 빌려 산 게 기껏 '종이 띠'라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얼마 전 네 오빠들 소속사 사장이 서울서 젤 비싼 집을 계약했다는 뉴스를 보고 이 이모, '피꺼솟'이었다. 울 흥청이가 저 사장 집 사는데 티끌을 보탰구나,   생각하니 얼마나 열이 받던지! 흥청아, 네 이모 넘의 집 산다. 내 집도 좀 사다오!


넌 내게 말했지. 덕질해야 하는데 용돈이 부족하다고. 난 네게 말했지. 학원 다니면 용돈 준다고. 그러나 넌 싫다했지. 지  머리 나쁜 건 유전이라면서 말이야. 유전 좋아하시네. 네 엄만 쌍팔년도에 새벽 첫 차 타고 왕십리에 있던 단과학원에 수학강의 들으러다닌 사람이다. 시험 기간엔 시립도서관 문 닫는 시간까지 공부하다 집에 왔고. 내가 말했잖아, 네 엄마 선도부 출신이라고! 모범생만 할 수 있던 선도부!


흥청아! 이 못난 이모가 인생선배로서 말하는데 이 세상에 공부만큼 쉬운 게 없더라. 왜냐, 공부는 정답이 있지만 인생은 정답이 없거든. 생각 좀 해보렴. 답도 없는 문제의 답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물론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공부를 하면 선택지가 많아져서 해답을 찾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겠니?


네가 그랬잖아, '금쪽같은 내 새끼'의 오은영 박사님처럼 되고싶다고. 슬프게도 그 직업은 공부를 해야한단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렇게 이 세상엔 공부를 안하면 하고싶어도 할 수 없는 직업들이 너무 많아. 공부를 안하면 아예 선택조차 할 수 없지.


얼마 전 '대화의 희열'에서 오은영 박사님이 말씀하셨단다. 공부는 못해도 해야 한다고. "공부는 대뇌를 발달시키는 과정 중 하나"라며  공부를 하면서 자기 신뢰감, 자기 효능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못해도 해야되는 게 공부라고.


언젠가 내가 쪽팔림을 무릅쓰고 공부 안하면 나처럼 산다고 했더니 뭐, “이모가 어때서? 그만하면 잘 살고 있어!”

참내, 그걸 위로랍시고...차라리 욕을 해라, 가시내야! 이 나이에도 생계를 위한 직업을 찾아야하는 내 심정을 알기나 하냐!


흥청아! 순간의 선택이 10년은 좌우하더라.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울 흥청이 오은영 박사님처럼 되는 그 날까지, 내 열심히 채찍질을 해줄 테니, 이번 방학에는 제발 공부 좀 하기를 바란다.


울 흥청이 의대 좀 가보자!


P.S 이번 달까지 나한테 빌려간 3만 7천원 안 갚으면 네 오빠들 얼굴에 빨간 딱지 붙여질 것이니 각오해라!


                  

 뺑덕이모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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