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수니 Dec 07. 2020

수능 답안지에 마킹을 못 한 문제는 8개였다.

위로를 주었던 감독관 선생님의 이야기는 다 사실이었다. 

수능은 나에게 벌써 십 년도 훨씬 넘은 일이다. 나는 수능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다음 해 1월 고졸로 살아갈 결심을 하기까지 기억이 없을 만큼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다. (결과적으로 대학을 가긴 갔다) 나의 이야기가 잠깐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떤 감독관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수능의 결과가 바뀔 수 있다. 나는 수능날 악마와 천사 감독관 모두를 만났다. 내가 가장 취약했던 과목은 영어였다. 마침 그해에는 영어가 어려웠다. 고민해가면서 마킹에 몰입하느라 종이 쳤는지도 몰랐다. 정신없이 마킹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시험지를 걷어야 했다. 하지만 내 마킹은 아직도 한참 남아있었다. 그때 소리치는 목소리의 날카로움이 분명히 귀에 들어왔다.


지금 당장 손 올리지 않으면 답안지 압수합니다.


미국 영화에서 경찰관이 총을 들고 하는 말인지 알았다. 정신이 든 나는 마킹을 멈추고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사실 이때만 해도 약간의 희망이 있었다. 당시에는 감독관 재량으로 마킹만 허락해주는 것이 드문일은 아니었다. (이게 당연하단 건 아니다) 다른 학생들의 마킹이 모두 되어 있는 답안지들을 차곡차곡 걷어서 시험관에게 건넸다. 내 인생이 걸린 일이라 시험관의 뒤를 따라 교무실까지 갔다. 가는 중간에도 감독관은 뒤돌아 보더니 따라와도 소용없다고 했다.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끝까지 해봐야 후회가 없다는 말이 정말 맞는 걸까란 생각이 들었다. 교무실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다른 감독관 선생님이 나에게 무슨 일 있냐고 물으셨다.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그 감독관이 앉은자리를 가리켰다. 그분은 살짝 바닥을 보셨는데 그때 눈빛이 '너 잘못 걸렸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분은 나 대신 마킹을 부탁해 주셨지만 그 감독관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더니 나에게 딱 한마디 했다. 

"다음 시험 잘 보세요" 


이래 놓고 시험 잘 보라는 거냐며 속으로 욕 하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자리에 앉았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5분이 채 지나지도 않아 한국지리 시험지가 내 앞에 도착했다. 18년 인생을 한 과목으로 조져버린 사람이 마음을 다 잡기에 5분은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문제를 풀긴 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자꾸 수능 총점에서 15점이 날아갔다고 생각하니 이번 생은 망한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자꾸 시험지 위에서 번졌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났다. 문제가 너무 어려웠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영어를 망쳤는데 이것 때문에 나머지 시험들도 망친다면? 이거야말로 더한 최악이라 생각했다. 나는 한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내가 정말 마킹 못한 문제를 다 맞혔을까? 평소에 영어가 약했는데 풀면서 어려웠는데 정말 한 문제도 안 틀렸을까? 마킹해도 틀린 게 있었을 거야. 그러니 지금 잘 풀어서 만회하자. 풀 수 있는 건 다 풀어보자. 


수능장을 나오고 싶은 맘을 누르고 제2외국어 시험까지 보았다. 수능은 끝났다. 내 인생도 끝났다. 오늘 빕스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무슨 낯짝으로 엄마 아빠를 봐야 하나 싶었다. 절대 말은 못 하겠고 눈물만 계속 날 것 같았다. 그때 시험 감독관 선생님이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지금은 수능이란 것이 아마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하지만 수능은 우리가 만나게 되는 첫 번째 관문일 뿐이라고 하셨다.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무수히 많은 문들을 통과하게 될 것이라고. 수능을 잘 본다고 해서 모든 관문들이 탄탄대로는 아니라고. 반대로 수능을 못 봤다고 낙심하기에는 다른 중요한 일들이 훨씬 많다고 하셨다. 지금 부족하다면 그다음 관문에서 좀 더 노력하면 된다고. 그리고 인생이 숫자를 높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고 하셨다. 결혼을 해서 누굴 만나는지도 중요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다고. 뜻하지 않은 감독관 선생님의 위로는 지금까지도 내가 힘들 때마다 힘을 준다.



십몇년이 지나고 보니 감독관 선생님의 위로가 맞았다. 수능 물론 중요하다면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수능은 우리가 살면서 통과하게 되는 첫 번째 관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울함에 갇혔던 나는 첫 단추가 잘못돼서 인생 다 망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어떤 한 가지의 상황이 절대적으로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상황으로 생긴 영향들이 모여서 바뀌기 때문이다. 수능을 못 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계속 못 봤다는 상황만이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 반대로 수능을 못 봐서 다른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면 그것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수능을 말아먹고 나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었는지 보여줘야 될 것 같다. 얼마 전에 백수 되고 지갑까지 잃어버린 내가 주제넘은 위로를 한 것 같아 민망한데, 힘내라는 위로의 마음은 진심이다.

그리고 나도 힘내자!




PS. 참고로 영어시험에서 마킹 못한 8문제는 모두 틀렸다.

       알고보니 마킹 하나 안 하나 결과는 똑같았다 ^^

   



매거진의 이전글 80만원이 든 지갑을 잃어버렸고 난 백수일 뿐이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