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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대택 May 09. 2020

021 로마올림픽 단일팀 무산과
4·19 학생의거

- 1960년, 4·19 학생의거로 또다시 연기된 단일팀

북한의 1960년 로마올림픽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한 제안은 1957년부터 시작됩니다. 북한의 세 번째 제안은 1958년 말이었고, 남한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IOC는, 특히 공산국들의 IOC 위원들을 중심으로, 59년 5월 뮌헨 총회를 통해 단일팀 구성을 위해 금년 내로 홍콩에서 남북 양자가 만날 것을 주문합니다. 


북한은 환영하지만 남한은 불편해합니다. 비무장지대를 경계로 남북이 대치해 소통마저 없으니 단일팀 논의는 미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일단 홍콩에서의 만남을 피한 남한은 60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을 IOC 총회에 촉각을 세웁니다. 홍콩에서 만나라는 IOC 주문을 피하기는 했지만, 공산국 위원들의 추궁이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여전히 요구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설상가상 IOC에서 KOC를 제명해야 한다는 공산국 위원들의 발언도 있었죠. 


이승만 정부는 외교라인을 동원합니다. 여기에 브런디지 또한 지연책을 쓰라고 비밀리에 제안합니다. 남한 정부와 KOC는 60년 2월 샌프란시스코 IOC 총회에서도 단일팀 논의를 미루는 결정을 이끌어냅니다. 남한에 우호적인 국가 위원들의 도움과, 특히 브런디지가 결정적 역할을 하죠. 결국 1960년 로마올림픽 남북단일팀 출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산됩니다. 이로써 북한의 최초 단일팀 제안부터 약 2년 반 동안의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에서는 4·19 학생의거가 일어납니다. 남한의 IOC 위원이었던 이기붕은 4월 28일 명운을 달리하고 이승만 정권은 붕괴합니다. 



북한올림픽위원회의 IOC 정식 인준을 경계하는 KOC


남한 내 정국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IOC에서의 ‘한국문제’는 진행형이었습니다. 2월 샌프란시스코 총회에서 일단 한숨 돌린 KOC는 로마 총회에서의 또 다른 북한의 시도를 경계하고 대응해야 했습니다. 로마올림픽 단일팀 구성에 성공하지 못한 북한은 8월 로마 총회에서 단일팀 구성에 대한 논의를 재개하는 것은 물론, 아예 한발 더 나아가 북한에 독립적이고 완전한 국가올림픽위원회 NOC 인준을 강하게 요구하게 됩니다. 이상백과 홍명희의 편지에서 이 내용이 보입니다. 


1960년 7월 9일 이상백은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1-1). 이상백은 1956년 이후 지속되는 한국문제가 다시 거론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적절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고 적으면서, 현재 한반도는 정전상태로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발발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번 로마올림픽에 참가하는 남한의 많은 선수와 임원의 가족과 친지가 북에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한국문제 논의를 연기해 주기를 바란다고 씁니다. 편지에서 이상백은 재차 ‘한국문제’ 논의 연기를 요청합니다. 


반면 북한의 홍명희는 1960년 7월 22일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1-2). 홍명희는 57년 53차 소피아, 59년 55차 뮌헨 총회 결정을 상기시키면서, 한반도에서의 단일팀 구성을 위한 북한위원회의 규정 이행과 노력의 경과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KOC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제안을 피했으며, KOC가 권력자만을 위한 단체였다고 비난하면서, 이들이 적정한 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위원회는 다음 달에 있을 57차 로마 총회에서 북한위원회가 완전히 인준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씁니다. 


이상백은 4·19 학생의거와 이기붕의 사망으로 KOC에도 변화가 있음을 알립니다. KOC에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서는 것을 알리는 동시에 8월 로마총회에서 한국문제가 거론되는 것을 염두한 것으로 보입니다. 7월 25일 이상백이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는 KOC 임원진의 변화를 알리고 있습니다 (21-3). 


‘1960년 7월 14일 KOC 총회에서 회장을 제외한 다음의 임원이 선출됨. 부회장 이상백 (회장 직무대리), 부회장 이철승, 명예사무총장 월터정. 4.19 학생혁명 이후 한국의 많은 단체들이 변화하고 있으며, 10월쯤에 회장을 선출할 것임.’




[사진 21-1] 1960년 7월 14일 KOC 총회에서 새롭게 선출된 부회장이자 회장 직무대리 이상백, 부회장 이철승, 명예사무총장 월터정 (좌부터)



남한의 정세 변화와 이상백의 KOC 변화에 대한 알림은 IOC로 하여금 KOC에 대한 인상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1960년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로마에서 개최된 57차 IOC 총회 회의록에는 공산국의 북한위원회 옹호와 지원에도 불구하고 브런디지가 이러한 남한 정세의 변화를 근거로 제시하는 내용이 보입니다 (21-4).



‘스토이체프는 북한 선수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안함. 브런디지는 IOC가 단일팀 구성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설명함. 양측이 아직 전쟁 중이며, 양측을 만나도록 주선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불가능했음을 언급함. 브런디지는 남한의 정부가 바뀌었고, 정치적 환경이 좋아졌기에 IOC의 노력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고 말함.’



더욱 강력하게 북한을 지원하는 공산국 IOC 위원들


1960년 8월 로마 IOC 총회에서도 브런디지의 KOC 지원은 여전히 무한하고 실효적이었습니다. 2월 샌프란시스코 총회에서도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한 북한과 공산국들은 절치부심 로마 총회를 다시 겨냥합니다. 북한의 지원하는 공산국 위원들은 무엇이라도 결과를 얻었어야 했죠. 샌프란시스코와 로마 총회 사이의 기간 동안 공산국들의 북한 지원 활동을 잠시 들여다보죠. 


1960년 5월 25일 소련 IOC 위원인 안드리아노프 Andrianov는 오토 마이어에게 편지합니다 (21-5). 



‘샌프란시스코 총회에서 에크룬드 Ekelund가 한국문제에 대해 제안한 것을 기억할 것임. 결과적으로 집행위에서 이를 검토하고, 그 결정을 남북 양쪽 위원회에 보내기로 했음. 로마올림픽이 이제 한 달 여 남은 상태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려주면 감사하겠음. 집행위 결정과 남북의 의사에 대해 알려주기 바람.’



Bo Ekelund는 스웨덴의 IOC 위원입니다. 60년 2월 샌프란시스코 총회에서 에크룬드는 의사발언 기회를 얻어 한국문제를 풀기 위한 제안을 합니다. 회의록에 의하면 그의 발언은 불가리아 스토이체프 Stoitchev, 영국 마퀴스 오브 엑스터 Marquess of Exeter, 핀란드 본 프랭켈 von Frenckell이 들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21-6).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21-7). 



‘우리는 IOC로부터 인준된 남북 모두에게 로마올림픽에 다음과 같은 조건 하에 참가할 수 있음을 알렸음. 즉, 한국은 단일팀만 참가해야 하며, 같은 유니폼과 깃발을 사용해야 함. 이에 대해 남한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이유로 북과 전혀 소통이 없다고 하여, 단일팀이 불가능하다고 했음. 여러분, 양측의 소통은 필요하지 않음. 양측이 선수 명단을 보내면 됨. 선수는 1959, 1960년 최고 기량의 선수를 선발하면 됨. 종목당 참가 선수는 한 국가에 배당된 수 이하로 한정함. 선수 이동은 우리가 관여할 것이 아님. 모든 선수는 같은 복장 이도록 함. 남북은 하나의 깃발에 동의해야 함. 그렇지 못한다면 개폐회식에 참가 못하며 올림픽 경기장에는 한국 깃발을 게양하지 않음. 이 경우 우리는 한국 선수들의 불참을 피할 수 있으며, IOC는 가능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 만약 이 제안을 어느 쪽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책임은 그들에게 돌아감.’



에크룬드의 제안은 IOC의 답답한 입장을 보여줍니다. 그간 다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문제가 풀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궁여지책의 제안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안드리아노프가 에크룬드의 제안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오토 마이어에게 묻는 것 또한 공산국 위원들의 답답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 21-2] 블라디미르 디미트로프 스토이체프 Vladimir Dimitrov Stoychev, 불가리아 IOC 위원



안드리아노프의 편지에 대해 브런디지는 답신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오토 마이어는 6월 14일 브런디지에게 메모를 남깁니다 (21-8). 



‘한국에 대한 에크룬드 씨의 제안에 대해 당신이 6월 9일 편지한 내용에 대한 답변. 나는 양쪽에서 어떠한 출전도 올림픽 기준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함. 그러나 제안 자체가 가능한 것일지라도 현실적이지 않음.’



6월 21일 스토이체프는 브런디지에게 전신을 보냅니다 (21-9). 북한위원회 인준은 물론 단일팀과 관련된 요청이었습니다. 



‘항상 권장하였지만, 북한은 독립적 인준을 주장하고 있음. 불가능하다면 조건부로 한 팀 구성을 바람.’



오토 마이어는 1960년 7월 19일 안드리아노프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합니다 (21-10). 



‘귀하가 보낸 5월 25일 편지를 참고로, 브런디지 회장은 집행위에 한국문제와 보 에크룬드 씨의 제안을 요청하였음. 대부분의 위원이 이 제안에 동의하였음. 그런데 어제 제네바를 지나는 한 남한 대표단과 대화하였음. 나는 에크룬드 씨의 제안을 전했고, 그는 남북의 접촉이 제한되어 있는 이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음.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북과 남을 조정할 방법이 없다고 했음. 어떠한 경우도 남이 북과 한 팀을 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음. 나는 독일의 경우로 이를 반박했음. 그는 독일은 전쟁을 하지 않아 한국과 다르다고 하였음. 남한은 로마에 선수 명단을 제출한 상태이며, 에크룬드의 제안은 여러모로 늦었다고 생각됨. 해결점을 찾지 못해 안타까우며 올림픽의 이상보다 정치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




[사진 21-3] (왼쪽부터) 에크룬드 Bo Ekelund (왼쪽 선수), 마퀴스 오브 엑스터 Marquess of Exeter, 본 프랭켈 Erik von Frenckell



이미 정치적 이해관계로 넘어간 단일팀 


오토 마이어의 이 같은 답장은 시점 상 한국문제에 대해 사무국이 제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답이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많은 위원들이 단일팀 구성을 요청하고 지지하고 있으나 정작 정치적 상황을 이유로 남한 측에서 불가능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죠.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남긴 메모에서와 같이 시기적으로나 정치 환경적으로 로마올림픽을 위한 단일팀 구성은 늦었던 것입니다. 오토 마이어는 더욱 정치적 영향을 의식하게 됩니다. 


오토 마이어는 안드리아노프에게 보낸 편지를 브런디지에게도 참조로 전달하면서, 편지의 한쪽에 메모를 남깁니다. 메모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7월 15일 당신의 편지와 관련해 안드리아노프에 대한 답은 정리된 것 같음. 너무 늦었으며, 에크룬드의 제안도 가능하지 않음. 어제 남한 대표가 말하길 스포츠인이 아닌 정치인인 북한과는 어떠한 것도 불가능하다고 함.’



오토 마이어는 북한의 적극성, 공산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북한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입장이 맞서고 있음으로 결론 내립니다. 그리고 이미 남북 단일팀이 정치적 배경에서 해석되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로마올림픽 개최 며칠 전인 60년 8월 15일, 한국 대표단장 김용식과 부인의 이름으로 광복절 축하 만찬 초청 건에 대해 오토 마이어는 초청장을 브런디지에 전달하면서 메모를 남깁니다 (21-11). 오토 마이어의 한국문제와 IOC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입니다. 



‘브런디지에게, 이런 정치모임에 IOC 가 섞이는 것을 원치 않기에 나는 가지 않겠음. 대신 나는 해당 일정에 로마에 있을 것이라 할 것임.’



오토 마이어의 한국문제 상황 파악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의 4·19 학생의거로 인한 정세 변화와 KOC 집행부 변화는 브런디지로 하여금 남한과 KOC가 앞으로 IOC의 기대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주게 됩니다. 이를 근거로 60년 8월 로마 IOC 총회에서 브런디지는 단일팀 구성에 대한 시한을 1964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자료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962년 작성된 문건인데, 도쿄올림픽 단일팀 구성과 관련한 외무부의 현황 보고서입니다. 여기서 1960년 로마 IOC 총회에서 있었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죠 (12-12). 



‘1960년 8월 19일부터 24일까지 개최되는 제57차 총회에 대비하여 아국 재외공관장에게 훈령하여 종전과 같은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여줄 것을 교섭하였고 동 총회에 옵서버로 참석한 이상백, 월타정의 활동으로 우리 문제는 차기 총회에서 재차 논의하기로 연기 조처되었다. 이때에 우리 대표들은 4월 학생혁명으로 인하여 문제 해결의 방도가 있을 수 있으니 이번 총회에서 한국문제 논의를 논의하지 않도록 이해시킴으로써 지연작전을 썼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 단일팀 출전을 재요청하는 IOC


56년부터 북한의 올림픽 참가 의지, 57년부터 IOC의 단일팀 요청, 59년 뮌헨 IOC 총회에서의 남북 양자 홍콩 만남 주선 의결 그리고 만남의 무산, 결국 로마올림픽 단일팀 출전 무산. 


이러한 경과는 최소한 올림픽 참가라는 측면에서 북한에게는 무소득이었고 남한에게는 전략적인 승리였습니다. 그렇다고 한반도에서의 단일팀 구성 요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압박은 남한과 KOC에게 점차 가중됩니다. 


로마올림픽이 막을 내리고 곧바로 1960년 9월 19일 오토 마이어는 KOC로 편지합니다 (21-13). 편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되었음. 다음 도쿄올림픽에서 남북이 한 팀으로 구성되어 출전하기를 다시 한번 요구하기로 논의되었음. 지난 두 번의 하계 동계올림픽에서 독일의 사례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음. 단일팀 구성이 불가할 경우 북한이 독립적으로 인준되어 참가하게 될 것임. 우리는 한 팀으로 참가하기를 희망하고 있음.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길 바라며, 해결되기를 바람.’



1960년 IOC 로마 총회는 한국문제를 대하는 IOC의 마지막 중요한 결정의 기로였습니다. 로마 총회 의결은 KOC에게 ‘단일팀’ 또는 ‘KOC와 별도의 북한 독립 인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의 지시에 가까운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토 마이어의 편지 마지막 문장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길 바라며’란 강한 어조는 KOC의 인식이 매우 불안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IOC 입장으로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주선할 만큼 주선했음에도 단일팀이 구성이 성사되지 못한 것에 대해 특단의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해결을 위해 결심해야 하는 쪽은 남한과 KOC였습니다. 


남한과 KOC에게는 새롭거나 또는 더욱 무거운 과업이 떨어진 셈이죠. 게다가 이번에는 브런디지마저도 더 이상 단일팀을 미룰 수 있는 명분이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인용 자료


(21-1)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0. 7. 9.)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1-2) 홍명희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 7. 22.)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1-3) 이상백이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 (1960. 7. 25.)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1-4) CIO, Minutes of the 57th session of the IOC in Rome,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 Session et CE – 1894-2013’, ‘Archives CIO Consultation Hard Drive’, OSC, Archive, IOC, Lausanne.


(21-5) 안드리아노프가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 (1960. 5. 25.)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1-6) 보 에크룬드 Bo Ekelund, 스웨덴 IOC 위원, 1948년부터 1965년까지 17년 재임. 마퀴스 오브 엑스터 Marquess of Exeter, 영국 IOC 위원, 1933년부터 1981년까지 48년 재임. 에릭 본 프랭켈 Erik von Frenckell, 핀란드 IOC 위원, 1948년부터 1976년까지 28년 재임. 블라디미르 디미트로프 스토이체프 Vladimir Dimitrov Stoychev, 불가리아 IOC 위원. 


(21-7) CIO, Minutes of the 56th session of the IOC in San Francisco,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 Session et CE – 1894-2013’, ‘Archives CIO Consultation Hard Drive’, OSC, Archive, IOC, Lausanne.


(21-8)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메모 (1960. 6. 14.)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1-9) 스토이체프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전신 (1960. 6. 21.)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1-10) 오토 마이어가 안드리아노프에게 보내는 편지 (1960. 7. 19.)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1-11) 오토 마이어가 김용식 초청장에 남긴 브런디지에게 전하는 메모 (1960. 8. 15.)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2-12). 국립외교원. (L-0002-04) [1262]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 4권 (V.1 1962). pp. 184-188.


(21-13)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편지 (1960. 9. 19.)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사진 설명


이철승 (1922-2016) 제18대 대한체육회 회장 (1961.1.28.-1961.5.15.), 대한역도연맹 회장 역임. 1961년 3월 말 제15차 UN총회의 한국 대표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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