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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대택 May 13. 2020

022 KOC가 제안한
단일팀 구성 조건 일곱 가지

- 1961년, 이상백과 월터 정의 단일팀 모색과 5·16 군사반란

1960년 5월 이승만은 하야합니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 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7월 민주당이 정권을 잡습니다. 7월 14일 KOC는 새로운 집행부로 이상백, 이철승을 부회장으로 월터 정을 사무총장으로 선출합니다. 장면 내각은 8월 18일 출범합니다. 


같은 8월, IOC는 로마 총회를 통해, 1964년 도쿄올림픽에 KOC가 단일팀을 만들지 못하면, 북한에 독립적인 국가올림픽위원회 NOC를 부여할 것이라 했습니다. KOC에게 ‘단일팀’ 또는 ‘KOC와 별도의 북한 독립 인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죠. 


KOC는 두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4·19 학생의거 후 남한 내 정국변화에 대응해야 했고 IOC의 요구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무엇이 먼저이기 전에 단일팀 구성과 관련한 KOC의 대응 기조를 변경해야 하는지의 문제였습니다. 



KOC가 새로운 IOC 위원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이기붕의 죽음은 한 정치인의 유고만은 아니었습니다. 이기붕은 KOC와 남한 정부의 공식적 IOC 연결고리였고 위상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을 막고자 했고 IOC는 북한의 국제사회 진출 경로의 하나였으니, IOC 위원이라는 거점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KOC는 이기붕을 이을 IOC 위원이 필요했습니다. 


1960년 7월 9일 월터정은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2-1). 편지에서 월터정은 세 명의 잠재적 위원, 순서적으로 이상백, 이원순, 월터정을 언급합니다. 이상백은 당시 KOC 명예사무총장이자 IOC와 아시아 지역에서 잘 알려진 인물로, 이원순은 당시 부회장이자 1947년 KOC 인준을 위해 스톡홀름 총회에 참석한 인물로 소개합니다. 월터정 자신은 47년 스톡홀름 총회 협상을 위해 뉴욕에서 브런디지를 만난 것을 시작으로 50년대 들어 KOC 대외담당 업무를 관여하고 있음에 추천된 것으로 설명하면서 이상백 또는 이원순 둘 중에 한 사람이 선정되기를 바란다고 적습니다.


월터정의 편지를 받은 브런디지는 7월 19일 답신합니다 (22-2). IOC 위원 선임의 고려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KOC가 공식적으로 요청해야 하며, 서류 형식을 보내니 작성하여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적습니다. 


브런디지가 IOC 위원 신청서를 보내는 동안, 월터정은 KOC의 임원 선출 결과를 알리는 편지를 브런디지에게 보냅니다. 7월 19일 월터정의 편지입니다 (22-3). 



‘... 정보를 더 전하자면 이상백은 KOC 수석부회장으로 선출됨. 나는 위원으로 재선 되고 이상백 후임 명예사무총장을 맡음. 나와 이상백은 로마올림픽 대표단으로 갈 것임. 이상백은 선수단장 요청에 고사하고, 전규홍을 임명함. 이원순은 KOC 회장에 낙선함. 그가 원한 것이며, 동시에 부회장 자리도 잃었음. 아마도 그는 이사도 사퇴할 것으로 보임.’




[사진 22-1] 전규홍 (1906-2001) (좌)와 정일형 (1904-1982) (우)



4·9 학생의거로 비롯된 정권의 변화는 로마올림픽 단장의 선임에도, KOC 집행부 구성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새로운 진영이 필요했던 것이죠. 실제적으로 이때부터 이상백을 대신할 월터정의 대외적인 KOC 활동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브런디지의 7월 19일 자 편지를 받은 월터정은 7월 28일 답신합니다 (22-4). IOC 위원 신청서를 동봉하면서 KOC가 IOC 위원으로 합당한 사람은 이상백만을 생각할 수 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상백은 오랜 기간 스포츠에 헌신한 내용을 IOC가 잘 판단할 것이라고도 덧붙이고 이상백이 로마올림픽에 한국대표단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적습니다. 첫 세 명의 추천에서 최종적으로 이상백만을 추천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상백의 IOC 위원 선정은 1964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하게 됩니다.



KOC의 대외담당 월터정의 본격적인 등판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붕괴 후 바로 구성되는 새로운 KOC 사무총장으로 월터정이 선임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월터정이 브런디지의 오랜 지인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950년 3월 2일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22-5). 



‘... 저는 이번에 대한체육회 실무총무로 임명됨. 개인적으로는 1948년 생모리츠에서 당신을 만났으며 제가 한국팀 단장이었음. 당신과 빙햄 씨 Mr. Bingham가 뉴욕에서부터 스위스까지의 여정에 큰 도움을 주었음...’ 



편지는 미국선수협회가 지난 기간 대한체육회를 도와준 경우를 나열하면서 그 역할과 관계에 감사를 적고 있습니다. 서윤복 선수의 보스턴 마라톤, 필라델피아에서의 역도 세계선수권대회, 그리고 동계올림픽에서 선수 지원까지를 언급합니다. 


이 편지는 현재까지 월터정이 브런디지와 교신한 첫 번째의 편지로 보입니다. 이 편지를 교환할 1950년이라면 KOC가 브런디지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지만 브런디지는 IOC 위원장도 아니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지도 않은 때였습니다. 


브런디지는 월터정의 편지에 3월 18일 답신하면서 자신의 사진을 보냈고, KOC와 한국 선수들을 응원합니다 (22-6)



KOC가 제시한 단일팀 구성 조건 일곱 가지


이상백의 IOC 위원 선정과는 별개로 한국문제에 대한 IOC의 요구에 대응할 KOC의 입장은 정리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상백과 KOC는 IOC를 설득시킬 수 있는 새로운 대응 논리와 방식을 모색해야 했죠. IOC와 브런디지는 단일팀 문제가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경고까지 한 상태였으니까요. 그러나 남한 내 정국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KOC가 자의적으로 해법을 마련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1960년 12월 23일, 월터정은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편지에서 월터정은 새로운 정국에서의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설명합니다 (22-7). 



‘나는 10월 21일 외무부 장관 특별보좌관 겸 자문관으로 임명됨. 정일형 외무부 장관과 동행해 11월 1일부터 17일까지 유엔 뉴욕과 워싱턴에 갔었음. 외무부 장관실에서 근무하며 아직 한국 상공회의소 대외업무를 보고 있기도 함. 1961년 1월 20일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외무부 장관과 함께 참가할 것으로 보임. 이때 당신을 만나 북한 문제를 얘기하려고 함. 이상백은 이 문제로 내 사무실에 자주 오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 초안‘을 작성하고 있음. 로젠의 IOC 가 이 문제에 대해 결정하기 전에 조만간 당신에게 보낼 것임. KOC는 이 문제와 관련해 내가 당신을 만날 것을 바라지만, 일단 외무부 장관의 일정에 따를 것임.’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자신의 일정을 알리는 편지와는 별개로 이상백은 KOC 회장 직무대행으로서 12월 24일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2-8). 편지는 KOC가 IOC에 공식적 입장을 보내기 전에 브런디지의 의견을 묻는 형식이었습니다. 일종의 KOC 입장 문서의 ‘초안’ draft인 셈이었죠. 


초안은 남북단일팀을 원칙적으로 찬성하면서도 실효적이지 않아 단일팀 구성이 불가능함을 적고 있습니다. 실현이 불가능한 이유로 현재 양측 간의 불통, 독일과의 차이점, 현존하는 군사적 긴장, 공산국의 야욕, 단일팀의 비현실성, 양측 조우의 선전 도구화 우려, 단일팀 구성 시 조건 등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만약 남북단일팀을 구성한다면 KOC가 요구하는 일곱 가지 사안을 적습니다. 편지는 이 제안이 최종이 아니며 IOC가 이러한 제안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상백이 초안에 기재한 1964년 도쿄올림픽 남북단일팀 일곱 가지 조건과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북한 선수를 우리 팀에 합류시킬 의향이 있음. 

2. 이 선수들은 1963년 11월까지 우리에게 통보되어야 함. 

3. 북한협회는 해당 선수의 기록을 IOC를 통해 KOC 전달해야 함. 

4. 전달받은 기록은 KOC가 한국아마추어선수협회 평가와 확인을 받을 것임. 

5. 선수단과 동행하는 북측 임원은 아마추어 스포츠맨이어야 하며 정치인은 불가함. 

6. 선수는 실제 아마추어 선수이어야 하며 정치 하수인은 불가. 

7. 모든 통신은 IOC를 통해서 진행됨.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임.’




[사진 22-2]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사적으로 문의한 단일팀 구성 조건 일곱 가지 초안 편지 (1960. 12. 24. 브런디지 컬랙션 KOC-01, 스위스 로젠 올림픽연구센터)



월터정씨 미국에 오시면 만납시다할 얘기가 많습니다


월터정의 편지를 받은 브런디지는 1961년 1월 3일 월터정에게 답신합니다 (22-9). 브런디지 또한 미국에 방문하는 월터정과 만나길 기대했습니다. 브런디지는 조만간 있을 IOC 총회에서 KOC가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KOC가 무엇이든 결정을 내려 IOC 총회에서 제안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죠. 게다가 이상백이 ‘초안’을 보내온 터에 브런디지가 일을 지체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편지는 간단합니다. 



‘이번 달에 미국에 오면 만나길 바람. 로마에서 이상백과 당신에게 말했듯이, 현재 한국의 상황은 심각하며, 오는 6월 그리스 아테네 IOC 총회에서 제시할 확실한 결정 내용이 필요함. 새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것에 축하함.’



편지를 받은 월터정은 1월 11일 답신합니다 (22-10). 



‘나와 이상백은 조만간 무엇인가 해야 함을 잘 알고 있음. 우리 상원과 하원은 한국문제를 보는 IOC의 생각에 대해 장단점을 논의했음. 신문 기사를 동봉함. 이번 정부의 입장 중 하나는 장면 국무총리 쪽이며, 다른 쪽은 사회주의 그룹임. 솔직하게 우리 KOC의 입장은 이 두 극단의 중간에 있음. 우리는 정부의 정책을 거스를 수 없음. 외무부 장관이 오는 3월쯤 유엔으로 갈 것이며 나도 동행함. 장관과 미국에 있을 때 당신을 꼭 만날 수 있도록 하겠음.’



이 편지에 동봉한 신문 기사들은 코리언 리퍼블릭 Korean Republic과 코리아 타임스 Korea Times와 같은 영문 일간지의 정치상황 스크랩들이었습니다, 61년 1월 초에 있었던 남한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는 기사들이었으며, 통일문제에 있어 양 극단적 대립을 보여주는 기사들이었습니다. 월터정은 이 기사를 통해 KOC가 섣불리 IOC 요구에 부흥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설명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1961년 1월 10일 자 코리언 리퍼블릭 기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22-11). 



‘[교류 반대 논의] 야당 신민주당은 최근의 통일을 위한 남북교류 프로그램에 대한 정책안을 내려고 함. 소식통에 의하면 오늘 당 정책위 회의에서는, 일요일에 제시한 민주당 5대 선언과 연계할 것이라고 전함. 또한 민감함 현안까지 다루지 않고 민주적 관점에서만 볼 것이라고 전함. [반대의견] 장 국무총리의 당은 단호히 ‘중립-한국’이나 북한 공산당과의 협상을 거부함. 그리고 편지, 인적 및 산업 교류도 거부함. 통일 논의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전함. 이는 최근 당내 불화 때문으로 보임. 당의 사무총장이자 중진인 유진산은 신진 급진파 서범석, 박준규, 정해영 등을 비난함. [통일 찬성] 진보그룹은 ‘자유민주한국’을 위한 통일 방식을 지지하며, 첫 단계로 서신, 경제 관람단의 교환을 주장함. 중진 보수인 유진산 의원은 공화정은 국력 증진이 필요하며 반공산 정책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함. 이는 경제재건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함. 이 두 그룹이 어떻게 협상할지 당이 다음 달 창당하기 전에 결정될 것임.‘




[사진 22-3] Korean Republic, 1961. 1. 10. 기사



남한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는 오토 마이어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혼란스러운 중에도, 북한은 IOC에게 단일팀 업무에 진척이 없음을 문의합니다. 이에 대해 1961년 3월 23일 오토 마이어는 북한 위원장 홍명희에게 편지합니다 (22-12). 



‘당신의 3월 10일 편지는 잘 받았음. 북한의 올림픽 참가와 관련한 작년 로마 총회 논의는 아시는 이유로 결론 나지 않음. 남측은 양측의 교섭이 불가하다고 생각함. IOC는 모든 것을 다했으며 단일팀이 성사되길 바람. 이 사안에 대해 위원장인 브런디지에게 말할 것이며, 오는 6월 아테네에서 있을 총회에서 논의되도록 하고 결과를 알리겠음. 이것이 우리의 원칙이며 세계 모든 젊은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임.’



그리고 오토 마이어는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를 브런디지에게 전달하면서 편지에 자신의 메모를 남깁니다. 메모는 남한이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에 대한 강한 불만을 적고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매우 옳지 않음. 그들은 다른 것도 아닌 정치 상황으로 몰고 있음. 독일과 비교됨.’



오토 마이어의 KOC와 남한에 대한 부정적 인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죠. 이미 지난 로마 총회에서도 제네바의 한국 대표단장 김용식이 8·15 광복절 만찬에 초청할 때도 다른 일정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오토 마이어는 이미 남한 정치인들이 단일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죠. 



IOC와 단일팀 구상을 조율하는 이상백 


월터정은 4월 15일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2-13). 편지는 이철승의 남한 체육계에서의 위치와 그의 정치적 위상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단일팀에 대한 자신들의 ‘초안’을 첨부합니다.


이철승은 당시 국회 국방분과위원장이었으며, 대한체육회장 (1961.1.28.-1961.5.15.), KOC 부회장이었습니다. 이철승은 제15차 UN 총회 대한민국 대표단장으로 1961년 3월 28일 미국으로 출국했고 UN 총회 이후 시카고에서 브런디지를 만날 계획이었습니다. 이철승은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에는 야당 인사였지만 새로운 남한 정치상황에서는 상당한 영향력과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죠. 그러니 IOC와 브런디지의 주요 소통로였던 월터정과 이상백은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보내고 5일 뒤인 4월 20일 월터정은 브런디지에게 다시 편지합니다 (22-14). 편지는 며칠 전 보낸 ‘초안’이 단지 자신들의 생각이며 KOC의 공식적 입장이 아님을 재차 강조합니다. 편지는 유엔주재 한국대표부에도 전달되며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철승이 브런디지를 만나기 전에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이철승과 KOC 내부의 의견 혼동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나와 이상백의 편지를 받았을 것임. 편지에서 언급했듯이 초안은 단지 우리의 생각에 불과하고 KOC 공식 편지는 아님. 당신을 직접 만나지 못하니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임. 우리는 북한이나, 북한과 IOC와의 관계를 얘기했던 것임. 알려드린 바와 같이 이철승이 다음 주 당신을 만날 것임. 이철승도 편지 내용을 알고 있으며, 이는 두 달 전 KOC 이사회에서 논의된 것임.’ 



이 편지에 대해 브런디지는 4월 25일 월터정에게 편지합니다 (22-15). 편지는 오늘 이철승을 만났으며, 자세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브런디지는 자신이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이로든 단일팀을 구성하는 시점에 왔음을 강조합니다. 만약에 단일팀이 구성되지 못하는 경우 북쪽이 독립적으로 팀을 구성해 출전할 수 있음도 적습니다. 


KOC와 브런디지는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두 달 후인 6월이면 아테네 총회가 있을 것이고 이 총회에서 KOC는 무엇인가 제시해야 했으며, 남한과 KOC를 지원하던 브런디지도 더 이상 KOC만을 두둔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 오토 마이어마저 남한의 정치적 개입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때였습니다. 여기에 북한을 지원하는 공산국들은 아테네 총회에서 단일팀 구성 여부를 몰아 부칠 기세였고, 이를 통해 북은 단일팀 또는 독립된 NOC로 인준받으려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철승의 의견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이철승의 회고록에는 당시 브런디지와의 만남에서 자신이 피력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22-16). ‘나는 시카고에 가서 브런디지 IOC 위원장을 만나 북한의 올림픽 참가 신청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귀국길에 일본에 들러 IOC 위원인 아즈마 류타로와 체육회장 쓰시마를 만나 북한의 올림픽 참가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철승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남한에서는 5·16 군사반란이 발생합니다. 이후 이철승은 돌아오지 못하고 7년간의 망명생활을 합니다. 


단일팀에 대한 이상백과 KOC의 구성, 이철승의 의견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인용 자료


(22-1)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0. 7. 9.)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2) 브런디지가 월터정에게 보내는 편지 (1960. 7. 19.)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3)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0. 7. 19.)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4)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0. 7. 28.)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5)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0. 3. 2.)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6) 브런디지가 월터정에게 보내는 편지 (1950. 3. 18.)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7)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0. 12. 23.)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8)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0. 12. 24.)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9) 브런디지가 월터정에게 보내는 편지 (1961. 1. 3.)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10)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1. 1. 11.)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11)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신문기사 스크랩 (1961. 1. 6-11.)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12) 오토 마이어가 홍명희에게 보내는 편지 (1961. 3. 23.)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13)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1. 4. 15.)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14) 월터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1. 4. 20.)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15) 브런디지가 월터정에 보내는 편지 (1961. 4. 25)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2-16) 소석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1). 시그마북스. 2011. p. 336.



표지 사진 


이상백. 1960년 4월 이기붕 IOC 위원의 사망으로 7월 KOC 부회장이자 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임된다. 1964-1966 IOC 위원으로 선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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