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런디지는 한국과 독일의 분단 문제를 단일팀으로 풀고자 했다
그동안의 시리즈 글에서 '한국문제'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습니다. 이번엔 잠시 '한국문제'를 소개하고 설명해야 할 듯합니다.
'한국문제' Korea Question은 한국전쟁 이후 분단된 한반도에서 북한 선수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게 된 시점부터 생긴 말입니다. 즉 ‘한국문제’의 본질은 북한 선수의 올림픽 참여기회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이죠.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는 서울에 사무소가 있는 대한올림픽위원회 KOC에게 남북한 선수 모두를 데리고 올림픽에 나오면 되지 않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독일이 이미 단일팀을 만들어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으니 이를 예로 삼아 한반도에서도 단일팀을 구성해서 참가하라고 주문합니다.
그런데 IOC의 이러한 요구와 기대가 받아들여지지 않죠. 남한과 KOC는 한반도가 독일의 경우와 매우 다르며, 자신들은 북한과 전혀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단일팀 구성이 실제로 불가능함을 토로합니다.
북한과 북한올림픽위원회도 입장을 표명합니다. 자신들은 몇 번이고 남한의 KOC에 단일팀을 제안했는데 남한이 이를 외면하고 있어서, 만약 남한이 북한 선수들을 데리고 올림픽에 같이 갈 의향이 없다면 IOC는 북한이 따로 독자적으로 선수단을 꾸려 올림픽에 나갈 수 있도록 허가해 주길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남한의 KOC와는 별개로 IOC가 자신들에게 완전하고 독립적인 국가올림픽위원회 NOC를 인준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IOC는 자신들에게 ‘한 국가 한 NOC 인준 원칙’이 있어 북한에 따로 NOC를 인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이미 한반도에는 KOC가 하나의 NOC로 1947년에 인준된 상태라는 것이었죠. 북한의 이러한 주장에 남한은 조만간 통일되면 자연히 문제가 해결되는데 북한에게 따로 NOC를 주면 나중에 두 개의 NOC가 존재하는 이상한 상황이 된다고 IOC에게 말합니다.
결국 북한 선수를 어떻게 올림픽에 참가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 때부터 실제로 북한 선수가 올림픽에 나올 수 있게 된 때까지, 그러니까 1956년부터 1964년까지가 ‘한국문제’란 단어는 지속적으로 IOC 총회와 집행위원회의 안건에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IOC가 사례로 삼은 독일 단일팀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었을까요. 독일 단일팀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문제’ German Question을 알아야 합니다. 잠시 독일의 IOC 역사를 들여다보도록 하죠.
독일은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한 14개 NOC 중의 하나입니다. 올림픽과 IOC의 원년 멤버죠. 첫 올림픽에서 독일은 그리스와 미국 다음으로 세 번째로 메달을 많이 딴 국가입니다. 독일 베를린은 1916년 올림픽 유치도시였죠.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1차 세계대전의 책임으로 독일은 1928년까지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1936년 베를린은 다시 올림픽을 유치하고 개최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0년과 1944년 올림픽은 개최되지 못합니다. 독일은 1948년 12년 만에 다시 열리는 런던올림픽에도 전쟁의 책임으로 참가하지 못합니다. 당시 IOC는 전쟁의 책임을 물어 일본과 함께 독일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근대 올림픽에서 IOC를 비롯해 국제무대에서 올림픽 운동 Olympic Movement에 매우 적극적인 국가였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 모두에서 중대한 책임이 있었지만 국제 올림픽 사회에서는 나름의 관계와 위치가 굳건히 존재했죠. 독일이 2차 세계대전 후에도 거의 바로 올림픽 무대에 적극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승전국에 의해 독일은 세 구역 (서독, 동독, 자를란트)으로 분할됩니다. 서독 (Federal Republic of Germany; FRG, 독일연방공화국)은 1949년에 다시 올림픽위원회를 구성하고 IOC로부터 전 독일을 대표하도록 인준받습니다. 이때만 해도 IOC는 다시 인준되는 서독의 NOC가 독일 전체를 대표하고 그로써 독일이 전쟁 전과 같이 하나의 팀으로 출전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팀이 분리될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죠. 그러나 현실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동독 (German Democratic Republic; GDR, 독일민주공화국)은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동독은 1951년 4월에 동독올림픽위원회를 만들고 IOC인준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거부되죠. 서독이 이미 한 국가로서의 NOC를 받은 상태였으니까요. 프랑스령의 작은 영토였던 자를란트 Saarland는 나중에 1955년 서독올림픽위원회와 합병됩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는 서독의 NOC가 선수단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동독은 IOC의 독일 단일팀 구성 요청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독립적 팀으로 나갈 수 있기를 요청합니다. IOC는 이를 또 거부하죠. 독일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서독만의 선수단이었습니다.
독일문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의 패전 후 서독과 동독의 분리. 서독올림픽위원회의 독일 전체를 대표하는 IOC 인준. IOC의 독일 단일팀 구성과 올림픽 참가 요청. 한쪽, 그러니까 동독의 불편함과 새로운 생각. 동독의 독립적 NOC 인준 요청. IOC의 거부. 이렇게 독일문제의 뿌리는 1949년 서독 NOC의 인준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독일문제는 1972년까지 지속됩니다.
어찌 보면 독일문제의 시작은 한국문제 시작과도 매우 유사합니다. 사실 IOC에서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 가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 문제 모두는 국제 정세와 매우 밀접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분단 상황의 국가들이었습니다. 한국, 독일, 중국이 그랬죠. 남한과 북한, 서독과 동독, 그리고, 약간 다른 경우지만, 중공과 타이완 사이의 갈등이었고, 이들 분단 상황의 권력들은 IOC와 올림픽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실상으로는 올림픽 주도권을 넘어선 국제사회에서의 주도권이기도 했죠.
독일문제가 한국문제와 조금 달랐던 것은 시기의 문제였고, 두 국가에서 전쟁이 있었던 것과 그렇지 않았던 것, 독일은 양쪽이 모두 IOC와 매우 오랜 관계가 있었다는 것,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독일은 단일팀을 구성해서 한 동안 올림픽에 참가했다는 것, 한국은 결국 단일팀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1956년 멜버른, 1960년 로마, 1964년 도쿄, 그리고 1968년 프랑스 그레노블 동계올림픽까지는 동서독이 단일팀 United Team of Germany으로 참가합니다. 그리고 1965년 동독이 IOC로부터 독립적인 NOC로 인준받으면서 1968년 멕시코 하계올림픽부터는 두 독일로 참가하게 됩니다. 다만 이때도 개회식에서는 하나의 깃발 아래 입장하게 됩니다. 동서독의 분리된 올림픽 참가는 독일이 다시 통일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한국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 참가하고, 1950년 한국전쟁을 경험합니다. 한국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전쟁 중이었고, 실제로 남한에서 만의 선수단을 꾸립니다. 북한은 1956년부터 IOC에 인준을 요청하지만 거절됩니다. 거절의 이유는 독일에서와 같은 논리였습니다. 대신 IOC는 1957년 북한올림픽위원회에 조건부로 인준을 주면서 올림픽 참가는 한 팀으로만 가능하다는 단서를 답니다. 그리고 독일의 경우를 참고하라고 합니다. 남한의 KOC에게도 이 사실을 확인시키고 단일팀을 강조하죠.
이후 북한의 선수를 참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독일에서와 같은 단일팀 구성을 IOC가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말이죠. 이미 1956년 독일은 성공적으로 단일팀을 만들었으니 한국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이 요청은 결국 성사되지 못하고 북한은 독립적으로 올림픽에 나올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1963년의 일입니다. 이로써 북한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 독립적으로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물론 이 또한 실현되지 못하고 북한이 최초로 참가한 올림픽은 1972년으로 기록됩니다.
2차 세계대전 후 IOC는 모든 것이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전쟁 전 회장이었던 에드스트롬 Sigfrid Edstrom이 회장직을 지속하고 대부분의 IOC 위원들도 다시 복귀합니다. 전쟁 후 첫 IOC 집행위원회는 1945년 8월 런던에서 열립니다. 먼저 전쟁으로 인한 어려운 상황에서 올림픽을 열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합니다. 결국 1944년에 개최하려 했던 영국 런던을 다시 48년 개최지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NOC 인준은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부여하기로 정합니다.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NOC.
그러나 이 원칙은 세계대전 후에 다시 재편될 국제정세와 질서에 부합되는지의 고민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겠죠. 당시 냉전을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NOC가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IOC의 요구가 있었다 하더라도 각 NOC의 리더들은 자국의 외교정책을 반할 수는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원칙은 독일문제와 한국문제, 중국문제가 만들어지게 한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선수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IOC로서는 원칙을 지키되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분단된 국가라도 한 NOC 아래 참가하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모든 선수가 차별 없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었으니까요. 여기에 동독과 북한이 반발하면서 이 원칙에 딜레마가 생겼고 그에 대해 동독과 북한이 싸우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독일문제와 한국문제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발선이 동일했습니다. 그리고 공산국 IOC 위원들이 동독과 북한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지원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유진영 국가들과 공산국들에게는 서로 매우 중요한 힘겨루기의 대상이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를 ‘질문’ Question이라 명명하게 된 것일지 모르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1951년 스위스 로젠에서는 동독과 서독이 만나 단일팀을 구성하기로 합의합니다. 그런데 동독이 이를 번복합니다. 자국의 합법성이 완전히 보장받지 못한다는 이유였죠. IOC는 화가 났지만 동독과 서독이 코펜하겐에서 다시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독이 아예 회의에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동독 대표단은 그 시간에 코펜하겐에 있었지만 나중에 회의 시간을 잘 못 알았다고 변명합니다. 일부러 약속을 어긴 것이죠.
이때 브런디지는 동독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내려놓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스포츠의 힘으로 정치와 대립함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51년 로젠 합의를 깬 동독 NOC 집행부가 물러나고 IOC의 단일팀 요구를 수용할 집행부로 교체되기 전까지 동독과는 어떠한 협상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23-1). 이제 그에게 단일팀은 모든 선수에게 참여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당위성보다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단일팀을 흥정하고 싶지 않다는 원칙이 확고해집니다 (23-2).
그러니 브런디지에게 한국문제는 독일문제와 너무도 비슷하거나 경우였고, 그래서 남북한에게도 독일과 같이 단일팀을 만들라고 끝까지 요구했던 것입니다.
브런디지는 1946년부터 52년까지 IOC 부회장이었습니다. 1952년부터 72년까지는 회장이었습니다. 독일문제가 대략 1949년부터 72년까지, 한국문제가 대략 1956년부터 63년까지, 또는 북한이 최초로 올림픽에 참가한 72년까지로 본다면, 이 기간들이 브런디지의 임기와 어떠한 연관이 있었는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브런디지는 자신이 올림피언으로서, 미국과 IOC에서의 권력자로서 스포츠에서 아마추어리즘 amateurism과 비정치성을 매우 중요시 여긴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논쟁적인 결정에 익숙했고 정치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23-1) "Recognition of the Olympic Committee of East Germany, " 48; IOC Archives, Minutes of the June 1955, IOC session, Paris.
(23-2) IOC Archives, Minutes of the July 1952 IOC session, Helsinki.
에이버리 브런디지 Avery Brund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