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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대택 Aug 02. 2020

024 남북단일팀 구성에 동의하는
박정희 정권

모스크바 IOC 총회 최후통첩과 외무부의 활동 개시 (61.6-62.8)


5·16 군사반란으로 인한 국면 전환


남한의 5·16 군사반란으로 남북한 단일팀 문제 논의 진행은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갑니다. 


이상백은 5·16 상황과 KOC의 입장을 1961년 6월 3일 브런디지에게 알립니다 (24-1). 이상백은 편지에서 남한이 빠른 답변을 주지 못한 경위를 설명하고 5.16 군사정변의 주체세력이 반공주의자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1964년 도쿄올림픽까지 남한의 새로운 정부 관계자와 함께 한국문제를 논의하는데 충분한 시간임을 주지 시킵니다. 이상백은 한국문제가 아테네 총회 (1961. 6. 19-21.)가 아닌 집행위원회에서 신중히 검토되기를 바란다고도 적습니다. 총회는 한국전쟁과 한국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경과를 잘 모르는 위원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 명분이었습니다. 편지의 말미에는 6월 17일 IOC 집행위원회와 NOC의 회의 참석을 위해 두 명 정도의 한국 대표를 보낼 것이며, 자신은 고혈압 때문에 도쿄까지만 가서 아테네로 떠날 아주마 (료타로 아주마, 당시 IOC 일본 위원) 지사를 만날 것이라고 적습니다. 


이후의 상황은 1961년 7월 18일 오토 마이어가 북한올림픽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엿보입니다 (24-2). 편지는 지난 6월에 아테네 총회에서 남북한위원회 문제가 논의되었고, 최근 남한 내 정부 변화로 내년까지 논의를 미루어달라는 남한위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2년 모스크바에서 열릴 총회에서 다시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1961년 하반기 동안 한국문제는 IOC에서 잠시 내려놓아졌습니다. 




[사진 24-1] 료타로 아주마 Ryotaro Azuma 도쿄도지사 (1959-1967), 일본올림픽위원회 위원장. 1964년 도쿄올림픽 유치에 활약한 인물



또다시 시간을 달라는 KOC 



해가 바뀌자 오토 마이어는 바로, 동시에 긴박하게 KOC에 편지합니다 (24-3). KOC가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한 회담을 1962년까지 연기 요청을 했었고, 해가 바뀌었으니 지금까지의 진행상황과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를 6월 모스크바 총회 이전인 5월까지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편지에 대해 2월 23일 이상백은 브런디지와 오토 마이어에게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24-4). 이상백은 먼저 1960년 5월부터 1961년 5월까지 남한에서 벌어진 상황을 설명합니다. 4·19부터 5·16까지의 기간이죠. 이상백은 남한 체육계의 일부가 남북 문화 교류를 주장했으며, 이전 국회의 몇몇 인물들은 북한과의 올림픽 단일팀을 제안했었다고 적습니다. 이상백은 5·16 군사정변은 정부의 부패, 부정, 지속적인 북괴의 위협에 의한 군사적 결단이었고, 이로써 혼란이 종식되고 남한을 구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KOC가 조만간 임원을 선출할 것인데, 이는 각 단체장이 뽑혀야 진행될 수 있기에, 한국문제에 대한 답변은 7월 말이나 8월 초에 가능할 것이라고 적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오토 마이어는 3월 초에 로젠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 당신의 편지 내용을 알렸다고 이상백에게 편지합니다 (24-5). 


KOC와 IOC의 의사 교환과는 별개로 북한은 나름의 일정 조정을 요청합니다. 1962년 5월 18일 홍명희가 브런디지에게 보낸 전문은 모스크바 총회를 앞두고 지난 아테네에서 미루어졌던 안건이 재논의될 것과 빠른 결정을 당부하는 내용이었죠 (24-6). 


같은 날 오토 마이어는 북한의 전문을 들어 브런디지에게 메모를 보내며 북한위원회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들에 대한 긍정적인 검토가 필요함을 표합니다 (24-7). 오토 마이어가 북한을 호의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문제는 여전히 남한과 KOC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형국이었습니다. 



그럼 9월 1일까지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IOC의 최후통첩



남한의 단일팀 구성 논의 연기 요청에도 불구하고 IOC는 더욱 조급해집니다. 1962년 6월에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는 다급해진 상황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총회 회의록에도 기록되고 있지만 (24-8), 6월 19일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낸 편지에서 총회 장면이 설명됩니다 (24-9). 


편지는, 모스크바 총회에서 다시 한국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이미 KOC가 7, 8월로 결정 연기를 요청하는 전보도 받았기에, 최종 결정 일정을 1962년 9월 1일로 정했으며 이때까지 알려주기 바란다고 적습니다. 만약 남한의 결정이 부정적이면, 현재 조건부로 인준 상태인 북한이 단독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도 적습니다. 


오토 마이어의 편지에 대해 7월 5일 이상백은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4-10). 편지는 모스크바 총회에서 결정된 한국문제 사안을 통보받은 것에 대한 답신이었습니다. 이상백은 총회가 열기기 전, 공산국들이 AP통신을 이용해 언론플레이를 한 것이며, 이로써 지역적으로 혼란을 야기시켜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적습니다. 그러면서 남한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브런디지 당신이며,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이 공식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지 결정되는 대로 알리겠다고 적습니다. 


이상백의 편지를 받은 브런디지는 7월 19일 답신합니다 (24-11). 브런디지는 미국에 왔던 장기영을 만났으며, 그에게 KOC가 처한 상황과 즉각적인 행동이 필요함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고 씁니다. 또한 북한은 정전협정도 특정 조건하에서 남북이 필요한 소통을 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도 적습니다. 이를 장기영에게 설명했으며, 장기영도 충분히 이해했다고 적습니다. 




[사진 24-2] 장기영 KOC 부위원장.  한국의 세 번째 IOC 위원 (1967-1977) (출처 Brundage Collection, UIUC, USA)





모스크바 IOC 총회 의결로 단일팀 구성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KOC  



오토 마이어의 6월 19일 보낸 편지에 대해, 대한체육회장 이주일은 8월 14일 답신합니다 (24-12). 이주일은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바라는 IOC의 공식적 견해는 받아들이겠으나, 그 내용을 외신을 통해 알았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합니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단일팀 구성에 동의하기로 했음을 적습니다. 다만 남한은 IOC 사무국을 통해 북측과 소통할 것이라고 적습니다. 


이주일의 1962년 8월 14일 편지는 우리 올림픽 역사에 중요한 사건입니다. 남한이 남북단일팀 구성에 동의한 첫 사례이자 이 동의를 기점으로 IOC에서 남북위원회의 위상과 구도가 변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물론 이 날의 이 편지는 자의적이기보다는 타의적으로 모스크바 총회의 의결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존재하기도 하지만요. 


장기영을 통해 브런디지와 IOC의 입장을 확인한 KOC와 남한 정부는 남북단일팀 구성의 불가피성을 인지하고 새로운 정부의 IOC 교섭 기조를 확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일팀 구성에 동의하고 이전의 대응과는 달리 보다 구체적으로 진행에 대한 전략을 수립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남북의 직접 대화가 아닌 IOC를 통한 대화의 방식이었을 것이고, 이러한 대화가 IOC 사무국의 원만한 업무 진행을 전제로 함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날 이상백도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4-13). 편지에서 이상백은 이주일 회장이 오토 마이어에게 단일팀 구성에 동의함을 알렸다고 씁니다. 추가적으로 북한의 언론플레이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표시합니다. 특히 모스크바 AP 통신이 단일팀 구성에 실패할 경우 KOC가 IOC로부터 퇴출될 것이라는 보도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KOC는 이후 단일팀을 구성하고 이행하는데 필요한 방법과 수단은 모두 IOC 사무국을 통할 것임을 밝힙니다. 


이상백의 편지를 다시 간략하게 인용해 보도록 하죠. 


‘장기영에게 모스크바 총회 내용과 오랜 숙제였던 단일팀 구성에 대해 들었음. 오토 마이어의 말대로 KOC는 한 팀을 만드는데 동의함. KOC는 새 대통령과 회의했음. 중장이며 국가재건위원회 부회장인 이주일이 KOC 위원장이며, 세 명의 부회장은 이효, 장기영, 이상백임. Japan Time 1962년 8월 9일 9페이지 기사를 동봉함. 사무총장 마이어가 9월 1일까지 KOC의 동의가 없을 경우 우리가 IOC로부터 퇴출될 것을 경고하는 것처럼 보도함. 단일팀 구성에 합의하고 이를 수행하는 수단과 방법을 고민하고 있음. 우리는 이를 IOC 사무국만을 통해 진행할 것임. 북한이 생각하는 판문점을 통한 통신은 없을 것임. 여기 현지 언론은 주로 일본에서의 평양방송을 통한 UPI와 AP의 기사를 인용함. 계속 연락하기로 함.’


이 편지에 대해 8월 30일 브런디지는 이상백에게 편지합니다 (24-14). 브런디지는 장기영과도 오랜 시간 논의했지만 이제 한국이 지체 없이 단일팀을 구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을 전합니다. 이상백의 언론보도 지적과 관련해서는 IOC는 ‘퇴출(throwing out)’을 얘기한 적이 없으며 이는 오보임을 확인시킵니다. 




[사진 24-3] 이주일, 1962년 당시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겸 대한체육회 회장





KOC가 매우 불쾌했던 오토 마이어



1962년 8월 21일 오토 마이어는 북한올림픽위원회에 편지합니다 (24-15). KOC가 단일팀 구성에 동의했으며, 소통의 창구로 IOC 사무국을 요청했다는 말도 적습니다. 같은 날, 오토 마이어는 이주일의 8월 14일 편지에도 답장하며 단일팀 구성 동의에 감사를 전합니다 (24-16). 그러면서도 KOC의 업무 진행 방식에 대한 불만을 적습니다. 


8월 21일 오토 마이어의 편지를 정리해 보죠. 


‘8월 14일 보내신 편지 잘 받았음. 단일팀 구성 동의 감사함. 현재 IOC 사무국이 남북 양측의 중간 통로로 이용되고 있음. IOC 사무국이 KOC의 결정을 북한에 알리고 있음. 놀라운 것은 IOC의 공식입장을 KOC가 언론, 특히 AP 통신 보도를 통해 알았다고 말하는 것임. 지난 몇 년 동안 이 문제로 상호 지속적으로 소통한 것으로 알고 있음.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들이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임. 여하튼 명확해졌으며, 좋은 결정임을 확신함.’


오토 마이어는 이 편지를 참조로 브런디지에게도 보냅니다. 남한과 KOC가 단일팀 구성과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IOC 사무국에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의도를 사전에 차단하려 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남북단일팀 구성과 관련하여 오토 마이어는 북쪽에 더 많은 신뢰를 주기 시작하는데, 1962년 9월쯤, 또는 그 이후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메모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24-17). 


‘오늘 인터라켄에서 열린 국제복싱연맹 총회에 참가한 두 북한 신사의 방문을 받았음. 내일 이 대표단 단장과 로젠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음. 남쪽 관료와도 화요일에 논의해 볼 것임. 해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어려울 듯함. 모든 책임은 남한 쪽에 있음. 북은 남쪽을 만나는 것을 포함해 내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함.’  



한국 정부의 개입은 철저히 비밀로 하라. 



이주일 KOC 위원장이 남북단일팀 구성에 동의한다고 공식적으로 IOC에게 통보한 1962년 8월 14일 편지는 그간 지루하게 이어져온 한국문제가 실제적으로 풀리는 시점이 됩니다. 이와 함께 남한은 본격적으로 외교적 활동을 가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주일은 5·16 군사반란 동참 인물로서 KOC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당시 최고 권력자와 KOC 현안을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남북단일팀 구성은 단지 KOC에 한정된 업무나 문제가 아니었으며 정부와 권력 차원의 현안이 되고 맙니다. 이는 외무부의 문건에서 잘 나타납니다 (24-18). 


1962년 7월부터 9월까지 3 개월에 걸친 약 40 쪽의 사료들은 남한 정부, 특히 외무부가 남북단일팀 구성에 동의한 시기부터 어떠한 외교활동을 벌였는지 보여줍니다. 


먼저 외무부는 당시 신응균 주 독일대사를 통해 동서독의 단일팀 구성 절차, 방법, 선수 선정, 국기와 국가의 문제 등에 대한 사항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할 것을 주문합니다. IOC가 지속적으로 독일 모델을 예로 들었기 때문이었죠. 신응균 대사는 1962년 8월 9일 독일올림픽위원회 빌리 다움 Willi Daume 위원장을 만나 나눈 정보를 보고합니다. 보고서는 남북단일팀 구성이 쉽지 않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 양쪽이 독립적으로 출전하게 될 것인데, 결국은 북한의 참가를 막기 쉽지 않을 것이라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기붕 이후 IOC 위원의 필요성도 적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기붕은 1955년부터 60년까지, 이상백은 64년부터 IOC 위원을 맡았으니, 한국문제를 IOC 내부에서 얘기할 인물은 따로 없었던 것이죠. 




[사진 24-4] 신응균 1962년 당시 주 독일대사




[사진 24-5] 빌리 다움 Willi Daume 당시 독일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미국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1962년 7월 11일 최운상 외무부 방교국장은 주한 미국 대사관 플랙 Mr. Fleck 1등서기관 first secretary으로부터 KOC가 IOC에 답신하는 방식에 대한 조언을 듣습니다. 플랙 서기관은 겸허한 자세로, 9월 1일 전에 답신할 것이며, KOC가 국제적 결정을 수용하더라도 국가의 정체성, 예로 국기 문양과 국가는 포기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할 것을 조언합니다. 이는 UN에서도 인정하는 명분이 있으며, 남한의 색과 문양 아래 북측이 선수단을 보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사진 24-6] 최운상 1962년 당시 외무부 방교국장




외무부는 IOC 사무국도 주시했습니다. 외무부는 주 제네바 대표부 공사를 통해 IOC 사무국에서 북한의 NOC 규정, 북한과의 서신 교환 내용, 총회 회의록 사본 등을 수집하여 송부하기를 주문합니다. 이에 1962년 8월 3일 이한빈 당시 주 제네바 공사는 오토 마이어를 만나 IOC 결정사항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여 보고합니다. 북한 NOC는 잠정 인준 provisional recognition 상태이며, 다음 올림픽은 KOC의 동의하에 참여 가능함을 알립니다. 만약 남한이 이를 거부하면 북한이 독립된 선수단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며, 북한과 왕래한 서신을 공유할 수 없다고 보고합니다. 또한 오토 마이어가 남한의 반발을 매우 경계하고 있으며 구체적 정보를 탐지하기 어려움을 알립니다. 




[사진 24-7] 이한빈 1962년 당시 주 제네바 대표부 공사




외무부는 독일과 제네바로부터 얻은 정보와 자료를 이주일 KOC 위원장, 문교부와도 공유합니다. 이주일 KOC 위원장의 단일팀 구성 동의에 대한 서신은 AP 서울발 기사로 언론에 노출되고 대만과 일본의 외교관들도 이를 주목하게 됩니다. 이한빈 주 제네바 공사는 앞으로 KOC의 구체적 활동과 정부 입장을 지시해 줄 것을 요청하고 외무부는 이한빈 공사에게 IOC와 접촉 시 정부에서 개입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유의하기를 당부합니다. 


오토 마이어가 남한의 관료와 만날 것이라는 브런디지에게 전달한 메모에 의하면 주 제네바 공사는 8월 18일에 오토 마이어를 만난 것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남한의 모든 조건을 수락한다고 통보해 왔으며, IOC 사무국이 중간 소통의 주어진 역할을 하겠으나 구체적 방법과 일손이 부족함의 상황을 설명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주 제네바 공사는 8월 26일 오토 마이어와 점심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KOC가 빠르게 IOC를 설득할 것과 북한과 IOC가 독일식 단일팀 구성 방식을 제안하기 전에 남한이 선도적으로 구체적 안을 제시할 것을 제안합니다. 가을 중으로 KOC가 IOC를 방문하고 브런디지 회장을 사전에 교섭할 필요도 있음을 건의합니다. 


IOC의 모스크바 총회 결정, 남한과 KOC의 단일팀 구성 동의로 이제 단일팀 구성 문제는 한국 정부와 미국의 외교적 업무 영역으로 편입됩니다. 






인용 자료



(24-1)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1. 6. 3.)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2) 오토 마이어가 북한올림픽위원회에 보내는 편지 (1961. 7. 18.)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3)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편지 (1962. 1. 10.)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4-4)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2. 2. 23.)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5) 오토 마이어가 이상백에게 보내는 편지 (1962. 3. 10.)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6) 홍명희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전문 (1962. 5. 18.)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7)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메모 (1962. 5. 18.)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8) CIO, Minutes of the 59th session of the IOC in Moscow,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 Session et CE – 1894-2013’, ‘Archives CIO Consultation Hard Drive’, OSC, Archive, IOC, Lausanne.


(24-9)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편지 (1962. 6. 19.)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4-10)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2. 7. 5.)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11) 브런디지가 이상백에게 보내는 편지 (1962. 7. 19.)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12) 이주일이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 (1962. 8. 14.)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13)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2. 8. 14.)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14) 브런디지가 이상백에게 보내는 편지 (1962. 8. 30.)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15) 오토 마이어가 북한올림픽위원회에 보내는 편지 (1962. 8. 21.)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4-16) 오토 마이어가 이주일에 보내는 편지 (1962. 8. 21.)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4-17)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메모 (1962. 9.)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4-18)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 문제, 1962-63. 전 4권 (V.1 1962). pp. 3-45.



[사진 설명


5·16 군사반란 (1961.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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