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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대택 Aug 12. 2020

027 로젠 회담 준비로 바빠진
외무부와 미 국무부

 회담에 자신 있었던 KOC와 남한 (62.12-63.1)


1962년 하반기의 상황을 복기해 보죠. 


1962년 6월 모스크바 IOC 총회는 남북이 단일팀을 만들거나, 아니면 북한이 남한과 별개의 선수단으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의결하고, KOC에게는 9월 1일까지 답변하라고 최후통첩 합니다. 


이 결정을 알게 된 주한 미국 대사관은 외무부를 불러 일단 정중하게 의결을 받아들이겠다고 하고 몇 가지 조건을 걸라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논의를 지연시킬 것을 주문합니다. 


8월 14일 KOC 위원장 이주일은 남북단일팀 구성에 동의함을 통보합니다. 그러나 남한 측은 수 개 월이 지나도록 별반 노력과 행보를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단일팀 구성에 대한 동의마저 번복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보다 못한 IOC는 12월 초 반강제적으로 남한에 통보합니다. 1월 24일 로젠에서 KOC, 북한올림픽위원회, IOC 3자가 만날 것이니 나오라고.


KOC는 로젠 회의를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갑작스레 남한 정부와 미 국무성은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회담의 주도권을 잡아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는 외무부의 전략 



로젠 회의에 동의하는 1962년 12월 즈음에 외무부는 관련 부서에 2급 비밀로 지침을 내립니다 (27-1). 지침은 1962년 6월 모스크바 총회부터 현재까지의 경위를 설명하고 어떠한 노선에서 교섭을 진행할 것인지 방책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개입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하며, 스포츠 정신에 비추어 순수한 체육 문제로 다루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문건은 북한이 판문점 외에 어떠한 경로로도 남한 측과 교섭할 수 없었기에 과거부터 빈번히 직접 협상을 제의해 왔었고 이번에도 그러한 정치적 욕구가 있음을 배경으로 적습니다. 북한은 도쿄올림픽을 통해 일본 교포에게 영향을 미치고, 조만간 있을 UN총회에서도 유리한 국면을 취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IOC가 원하는 독일 모델은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문서는 우리의 방책으로, 8월 14일 단일팀 구성 동의 후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가 상정되어 끝날 때까지 지연책을 써 왔으며, 어떠한 이유로도 남북한 직접 접촉의 전례를 만들지 않기로 했음을 적고 있습니다. 


남한 정부는 UN에서 한국문제 논의가 완료됨과 동시에 1963년 2월 8일 IOC 집행위원회에서의 주도권을 위해 12월 12일 다음과 같이 IOC에 제의했다고 적습니다. 즉, 로젠 회담에 직접성 경비는 우리가 부담하며, 쌍방 최대 5명의 실무자급 회의를, IOC 중재 아래, 63년 1월 21-25일 만날 용의가 있음을 알렸다는 것입니다. 


이 제의가 북쪽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가 IOC의 요구에 부응했다는 명분을 얻고 궁극적으로는 태극기와 애국가로 단일팀이 출전한다는 시나리오였습니다. 



완고한 오토 마이어분주해진 남한 정부



남한 정부의 회담 대책과 함께 주 제네바 남한 공사는 12월 16일 정 서기관으로 하여금 오토 마이어와 만나 상황을 보고하도록 합니다 (27-2). 이 만남에서 오토 마이어는 이번 로젠 회담에서 단일팀 구성에 합의할 것과, 그 경우 국기, 국가, 복장을 하나로 통일할 것과, 이후 여러 번의 회담을 통해 합의해 갈 것을 주문했다고 적습니다. 또한 회담은 어떠한 정치적 발언과 토의도 허용하지 않겠노라 했다고 적습니다. 


정 서기관은 22일 다시 다시 오토 마이어를 찾습니다 (27-3). 오토 마이어는 IOC의 대표가 3명이니 각 측의 대표를 3명으로 제안하고, 자신은 어떠한 정치적 압박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며, 북측의 누가 체육인이 아닌 정치인인지 알게 되면 자신에게도 이를 알려달라고 했음을 적습니다. 오토 마이어는 1월 24일 회담 후에 저녁식사에 양측을 모두 초청할 것이며, 회담 전에는 양측과 만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음을 적고 있습니다.


이 보고들은 남한 내에서의 회담 지침을 구성하도록 만듭니다. 12월 25일 외무부의 메모는 마이어의 제안대로 3명의 대표, 이상백, 월터 정, 손기정을 지명합니다 (27-4). 24일 마이어의 저녁 만찬 초대는 남한 측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남한이 먼저 전원을 초대할 필요가 있음을 적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먼저 초대하게 되면 적정한 이유를 들어 응하지 않는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외무부의 내각회의 보고서는 1956년부터 1962년까지의 단일팀 관련 경과를 일지 형식으로 작성하고 (27-5) 올림픽대책위원회는 1962년 12월 일자로 ‘올림픽 단일팀 구성 문제’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합니다 (27-6). 자세한 내용은 국립중앙도서관 해외기록물에서 열람 가능합니다. 



바빠진 미국 대사관



남한 정부가 로젠 회담 준비에 한창 분주한 가운데 주한 미국 대사관의 하비브 Philip Habib 참사관은 1963년 1월 7일 미 국무부 극동업무국 Office of Far Eastern Affairs 한국 업무 담당자인 Officer in Charge, Korean Affairs 크리스 노리드 Christopher A. Norred Jr. 에게 편지합니다 (27-7). 편지는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미국 대사관, 서울, 1963년 1월 7일. 파우치로 한국 대표단이 북한과 로젠에서 만나는 정보를 보냄. 대표단 일원인 월터 정은 1월 14일 시카고에서 브런디지를 만날 것이고, 이번 일의 결정권자인 김진구 대령과 함께 갈 것이며, 다음날 워싱턴으로 가서 국무부 담당자와 만날 것으로 보임. 이번 자문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한국 정부가 로젠에서의 명확한 행동계획이 없어 보이기 때문임.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이, 그들은 우리가 제안한 독일 모델을 꺼리고 있음. 더욱이 남한 외무부가 독일 대사관으로부터 받은 정보는 우리가 아는 독일 단일팀 정보와 다름. 우리도 명확한 바 없어 더 정확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음. 여하튼 김과 정이 워싱턴에 도착하면 잘 자문해주기 바람.’



로젠으로 향하는 남한 대표단



IOC 올림픽연구센터 Olympic Studies Center 브런디지 컬렉션 ‘KOC-01’ 파일의 마지막 사료는 1962년 12월 27일 자 편지입니다. 1946년 12월 27일 전경무가 당시 IOC 회장인 에드스트롬 Sigfrid Edstrom에게 보낸 편지가 이 파일의 첫 사료이니, 이 파일은 정확히 KOC 초기 올림픽사 16년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안타깝지만 브런디지 컬렉션에서의 KOC는 1962년을 마지막으로 1963년부터의 자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상백과 브런디지 간의 서신 교환도 1962년 8월 14일을 마지막으로 1962년 하반기의 서신 사료는 없습니다. 실제로 이상백과의 사이에 편지 왕래가 없었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여하튼 이 기간 동안의 사료는 비어 있습니다. 다행히 1963년 1월부터 브런디지와 이상백 사이의 편지 교환 자료는 다시 시작합니다. 그 자료를 통해 다시 KOC와 브런디지의 소통을 보도록 하죠. 


1963년 1월 18일,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는 로젠으로 떠나는 한국대표단의 활동이 보입니다 (27-8). 편지는 1월 14일 월요일, 이상백 자신과 월터 정, 김진구, 이재학과 함께 회의에 참여해 준 것과 북한의 노림수와 남한의 전략을 들어준 것에 감사함을 표하고 있습니다. 


로젠 회담으로 향하는 남한 대표단의 여정은 두 개로 나뉩니다. 총 9명이 출발하는데 4명은 미국으로 5명은 유럽으로 떠납니다. 


미국 여정은 1월 11일 도쿄, 12일 미국 시카고에서 브런디지 면담, 14일 워싱턴에서 국무부 레이놀즈 면담, 15일 뉴욕, 17일 영국 런던 IOC 집행위원 면담, 19일 프랑스였습니다. 유럽으로의 여정은 17일 독일에서 3명의 부회장과 축구협회장 면담, 19일 프랑스에서 미국 여정팀과 합류, IOC 집행위원 면담의 일정이었습니다. 이들은 21일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하게 됩니다 (27-9).


남한 대표단은 제네바에 도착한 당일 9명의 기자와 인터뷰 후에 성명서를 발표하고 다음 날인 22일 로젠으로 이동합니다. 북한은 12명의 대표단이 18일 로젠에 도착하였으며, 이들은 전적으로 중공대사관이 돕고 있음이 보고됩니다. 이상백은 로젠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대신 제네바에 머물면서 상황을 주시한 듯합니다. 


제네바에 도착한 대표단의 인터뷰 내용은 동아일보 1월 22일 자에서 소개됩니다 (27-10). 기사의 일부는 ‘김진구 씨는 한국 측이 회담에서 성의를 다할 것이며, 북한도 성의를 다해 줄 것을 희망한다.’고 보도합니다. 


국립외교원 자료에 의하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 외무부, 한국대표단의 이동선 상의 국가 대사관 등과의 업무 연락과 협조 내용이 50쪽 이상의 분량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자료를 참고하면 좋을 듯합니다 (27-9).


이 자료에는 몇 가지 사실들을 확인시킵니다. 북한은 대표단을 20여 명 보냈으며 24일 회담 후 2월 초까지 머물면서 2월 8일 열릴 IOC 집행위원회를 대비할 것이라는 정보, 호텔 예약은 베른에 있는 중공대사관에서 도와줬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비공식 협조 연락관은 주 제네바 미 대표부의 부공관장 Minister-Counselor 윌리엄 깁슨 William M. Gibson으로 지정될 것이라는 등의 내용입니다. 김진구 남측 대표단장은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에 요청하여 정일영이 지원 차 스위스로 출장을 오기도 했습니다. 가히 양측의 정치 외교적 노력과 지원이 보입니다. 



설리반의 제안 



이상백과 월터 정은 브런디지를 만난 다음날 워싱턴에서 1963년 1월 15일 예거 Yager 동아시아국장을 만나고 바로 연이어 설리반 William H. Sullivan 동아시아국 유엔 자문관 UN Advisor를 만납니다. 외교원 자료는 정일권 당시 미국대사의 명의로 이들의 면담을 보고하는 내용이 보입니다 (27-9). 


이 면담에서 설리반 자문관은 남한 대표단이 브런디지를 만났다는 것에 대해, 자신들도 지난 4년간 브런디지를 비공식적으로 접촉한 경험으로 그와의 언약은 가급적 문서로 받아두어야 한다는 말을 남깁니다. 로젠 회담의 구체적 작전계획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월터 정은 이번 회담이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고, 정치적 행동과 발언을 빌미로 북한을 궁지에 몰 것이며, 여의치 않을 경우 지연작전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한의 조건으로 태극기와 애국가를 고집할 것이라고도 설명합니다. 미국 측은 최근 북한의 대중공 관계를 보건대 회담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음도 적습니다. 


설리반은 IOC 집행위원의 결의도 중요하지만 다음 올림픽이 일본에서 개최됨으로 일본 대표와 밀접히 교섭하여 대 한국 초청이 남한에 유리할 수 있도록 꾸준한 노력이 필요함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독일을 예로 들어 서독 측과 유사한 입장이니 서독 대표들과 협의함이 유익할 것도 지적합니다. 미국 대사관은 이 제안을 실천할 필요성이 있음을 문서의 마지막에 적습니다. 




[사진 27-1] 윌리엄 설리반 William H. Sullivan. 미 국무부 동아시아업무국 Bureau of Far Eastern Affairs 유엔 자문관 UN Advisor







인용 자료



(27-1)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1 1962) pp. 125-127. 


(27-2)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1 1962) pp. 170-171.


(27-3)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1 1962) pp. 173-174.


(27-4)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1 1962) pp. 179-182. 


(27-5)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1 1962) pp. 184-191. 


(27-6)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1 1962) pp. 192-199. 


(27-7) 600.3 Amusement Sports, 1963 (기록물명), RG 84 Records of the Foreign Service Posts of the Department of State, 1788-1964 (문서군명), Korea, Seoul Embassy, Classified General Records, 1952-63 (시리즈명), 국립중앙도서관 해외기록물, pp. 77-78. 


(27-8)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3. 1. 18.)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7-9)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p. 3-53.


(27-10) 동아일보 (1963. 1. 22.) “[전한국팀 조직제의] 김진구씨는 21일 밤을 제네바에서 보내고 22일 로잔느로 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씨는 제네바 공항에서 발표한 간단한 도착성명에서 ‘한국 측은 북한괴뢰가 24일 상오 10시 (한국시간 하오 6시) 로잔느에서 개최되는 회담에서 성의와 스포츠맨쉽을 보여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한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모든 성의를 다할 것이며, 북한괴뢰도 성의를 다해 줄 것을 희망하여마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김씨는 계속해서 종전에는 북한괴뢰선수들이 정치적 사정 때문에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었던 것이나 그곳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하였다.”



[사진설명]


1956년부터 약 10년간 대한체육회가 있었던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10번지 (현 플라자호텔 자리) 건물. 대한체육회는 1966년 6월 무교동에 지하 1층, 지상 10층 규모의 건물로 이전했다가 1989년 12월 현재의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회관으로 옮겼다 (사진 출처, 문화일보 ‘플라자호텔 자리에 있던 대한체육회 회관’ 2015.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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