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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대택 Aug 17. 2020

028 로젠 회담,
IOC가 제안한 한반도기

뭐든 받는 북한, 일단 싫은 남한, 선택하라는 IOC


1963년 1월 24일, 드디어 로젠에서의 날이 밝았습니다. 


해방 이후, 남북의 정권이 분리된 이후, 한국전쟁과 정전협정 이후, 남북이 대표단을 꾸려 민간차원에서 처음으로 마주 앉은 기록의 날입니다. 


한반도에서의 올림픽 역사, 또는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남북의 첫 만남이자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시간으로는 약 6년 이상 지속된 ‘한국문제 Korea Question’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첫 날로 기록됩니다. 로젠 회담은 후에 ‘남북체육회담’으로 불리는 ‘홍콩회담’으로 연결되는 교두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북한은 이 날을 얼마나 학수고대했을 것이며, 남한은 얼마나 피하고 싶었을까요. 양측의 준비 상태는 최대치였을 것이며 서로는 회담장에 자신감을 가지고 걸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최소한 현재의 자료를 근거로 보자면 남한 측은 그러했습니다. 


남한 측은 이미 수립된 전략에서, 그리고 브런디지와 미 국무부에게 설명한 것처럼, 애국가와 태극기, 선수 선발 등에서 모두 강한 입장을 취했으며, 북한을 정치적으로 몰아, 자연스럽게 회담을 지연시키려는 계획으로 회담장에 입장했습니다. 남한 측은 ‘코리아 Korea’의 원조는 KOC이고, 이것이 보장되어 있으니, 이것을 주장하면서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미국 또한 불안감이 없지 않았지만 회담이 불리할 것으로 여기지는 않은 듯합니다. 


굳이 남북한의 차이가 있었다면, 회담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남한은 항상 조건을 걸어 놓은 상태였고 이번 회담에도 조건을 전제했지만, 북한은 항상 무조건으로 단일팀 구성에 합의하고 협의할 것이라는 태도로 일관했었고 이번 회담에도 그랬습니다. 


일단 남한은 가진 것이 많았고, 북한은 가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남한은 가진 자로서 양보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의 입장이 명확했습니다. 반면 IOC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동등하게 바라봅니다. 북한은 어떤 것이든 좋다고 동의하고 기다렸습니다. 


남한 측의 입장에서 협상의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북한은 무조건이라는 전제로 IOC가 제안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였습니다. 남한은 꼬치꼬치 북한과 IOC의 제안에 거북함을 표현했습니다. 누가 봐도 협상의 태도로는 북한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남한의 입장이 무력화됩니다. 결국 남한 측은 단일팀 구성에 동의하는 것은 물론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던 조건까지 모두 합의에 이르게 됩니다. 


로젠 회담은 북한이 얻은 회담으로 끝납니다. 



로젠 남북체육회담 회의록 



회담이 끝나고 주 제네바 공사는 외무부 장관에게 회의 결과를 3쪽으로 요약하여 바로 전신으로 보냅니다 (28-1). 남한 측에서는 김진구, 민용식, 월터 정, 김장연, 통역 한병기가, 북한 측에서는 김기수, 김화영, 장성규, 김영규, 통역 옥인섭이 참가합니다. IOC 측은 모하메드 타허 Mohammed Taher 이집트 IOC 위원, 알베르 마이어 Albert Mayer 스위스 IOC 위원, 오토 마이어 IOC 사무총장이 배석합니다. 사회는 타허가 봅니다. 회의는 10시부터 12시 반까지, 그리고 오후 2시 반부터 4시까지 열립니다. 




[사진 28-1] 모하메드 타허 Mahammed Taher 이집트 IOC 위원 (1934-1968)



회의 안건은 세 가지였습니다. 선수와 임원 선발 문제, 국기 문제, 그리고 국가 문제였습니다. 먼저 선수와 임원 선발은 원칙적으로 독일의 사례를 준용할 것을 합의합니다. 국기 문제는 오랜동안 논쟁합니다. 국기와 국가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과정은 주 제네바 공사의 전신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풀어 적어 봤습니다. 






IOC : 국기는 어떻게 할까요?

북한 : 전면에는 태극기 후면에는 인공기로 하면 어떨까요?

남한 :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좌측 사람은 좌측기만, 우측 사람은 우측기만 보잖아요.

IOC : 그렇네. 이건 좀 곤란하겠네.


북한 : 그럼 한반도 지도 가운데 오륜 표식 넣으면 어떨까요?

남한 :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마치 한반도를 양분시킨 느낌이잖아요.

IOC : 뭐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은데... 남한이 그렇다면 뭐 할 수 없죠. 


IOC : (오토 마이어) 그럼 백색 바탕에 위쪽에 오륜 표식을 넣고 그 밑에 KOREA라고 쓰고 상측 왼쪽에는 태극 문양, 오른쪽에는 북한의 별 표식을 넣으면 어떨까요?

북한 : 네 좋네요. 찬성입니다.

남한 : 이것은 결코 민족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반대합니다. 


IOC : (알베르 마이어) 오토의 제안을 수정해서, 양쪽 귀퉁이의 태극 문양과 별 표식을 없애고 그냥 오륜 표식에 KOREA라고만 쓴 것이 어떤가요? 

북한 : 좋습니다.

남한 : 이 모습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태극기 외에는 안 되겠네요.

IOC : 흠... 그럼 집행위로 넘겨서 결정하도록 하죠.

북한 : 그럽시다. 

남한 : 네! 그럽시다. 


IOC : 자 그럼 다음은 국가요.

북한 : 전체를 50초로 하고, 전반 25초는 북한가, 후반 25초는 남한가로 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반대 순서로 해도 되고요. 

남한 : 안됩니다. 국가는 애국가라야만 합니다. 


(갑론을박, 시끌벅적)


남한 : 그럼 해방 전에 부르던 아리랑은 어떨까요?

북한 : 엥?

IOC : (오토 마이어) 엥?

IOC : 다들 괜찮으신가요?... 그럼 아리랑으로 합시다. OK? OK! 꽝 꽝 꽝! 






오토 마이어 씨 우리 남한은 국기 문제를 집행위에 위임하지 않았습니다



남한 대표단은 선수와 임원선발의 문제는 독일 모델을 따르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국가는 아리랑으로, 국기는 조금 더 생각해 보자는 식으로 지연시킨 것으로 평가하고 나름의 회담을 처리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국기 문제와 관련하여 오토 마이어와 서로 다르게 이해한 것이 회담 후에 드러납니다. 남한 대표단은 당황합니다. 


남한 대표단은 IOC에서 더 연구하여 줄 것과 국기 문제에 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한 이유를 집행위에 보고하여 줄 것을 제의한 것이었고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회담이 끝난 후 오토 마이어는 집행위가 국기 문제를 결정하도록 위임된 것으로 언론 발표를 했고, 남한 대표단은 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성명을 발표합니다 (28-2). 


제네바에 머물던 이상백은 1월 27일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8-3). 편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1월 24일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의 불어 보도자료를 봤음. 깃발 색깔은 이사회에서 결정하도록 남겨졌다는 것을 보았음. 김진구는 ‘깃발의 색깔을 남겨서 IOC 가 더 많은 연구를 통해 고려하기를 요청’이라 말했음. 언어의 차이로 이해함. 우리는 회의의 모든 과정을 녹음했고 이를 증명할 수 있음. 우리는 남한에 보고하지 않은 상태며, 이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음. 우리 대표단은 선수와 임원 선발, 국가에 동의했으며 후자의 경우, 다시 확인하겠음. 금요일 (25일) 저녁, 우리의 만찬 초대에서 김진구는 마이어에게 보도자료의 문제를 지적했고 마이어도 오류를 인정했음. 남한 사람들은 우리가 북한에 모든 것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 우리가 곤경에 처해있음. 시카고에서 말했듯 우리는 여기 단일팀을 만들려 왔음. 합의 가능한 수준에서 최선을 다할 것임. 그러나 알겠지만 동의하는데 한계에 다다를 것들이 있음. 우리의 요청은 로젠에서 2월에 집행위가 열릴 때 국기 문제와 관련해 정정되도록 도움을 주기를 바람.‘


오토 마이어의 언론 발표를 접한 남한 정부는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동시에 이에 대한 대책에 한동안 분주해집니다. 외무부 장관은 로젠에서의 교섭에서 국기 문제를 IOC에 위임할 것이라는 소식에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커질 것을 염려하고 로젠의 KOC 대표에게 태극기 사용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만일 태극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보이콧을 불사하는 결심으로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차관에게 지시합니다 (28-4). 이후 이 문제가 합의된 것이 아니며 사실무근이고 오보에 지나지 않음을 재확인합니다 (28-5). 


로젠 회담에서 국기 문제에 대한 혼선이 정리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집행위에 이 문제를 맡겨 놓는 것도 능사는 아니었습니다. 2월 5일 KOC 대책위원회는 주 제네바 공사에게 IOC 집행위에서 논의될 국기 문제에 대한 훈령을 다시 보냅니다 (28-6). 


남한은 우선적으로 태극기를 1안으로, 만약 이를 IOC 집행위가 반대한다면 태극마크에 오륜 표식이 들어간 것을 2안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다각적인 IOC 위원 로비가 필요함도 적고 있습니다.



브런디지의 한반도기 제안 



로젠 회담이 끝나고 IOC 집행위원회가 열리기 전인 2월 6일 저녁 브런디지는 월터 정과 손기정을 만나자고 청합니다. IOC 집행위원회를 위해 브런디지는 27일에 스위스에 온 터였죠. 약속 장소에 간 두 남한 대표들은 그곳에 북한 대표인 김정항과 김기수 그리고 통역사가 함께 참석함을 알게 됩니다 (28-7). 


그 자리에서 브런디지는 이번 집행위원회의에서 남북 단일팀 국기에 대해 논의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조속이 남북 양측이 다시 다른 장소에서 만나 해결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한반도 지도 위에 오륜 표식을 한 깃발 또는 흰 바탕에 오륜 표식을 하고 그 밑에 ‘코리아연합팀 UNITED KOREAN TEAM’이라고 쓴 깃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자신에게 알려줄 것과 앞으로는 모든 남북한 문제는 양측이 직접 해결할 것을 요구합니다. 


아마도 스위스에 도착한 브런디지는 남북한 로젠 회담의 결과를 보고 받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수용하겠다는 북한과 이런저런 조건으로 수용이 불가능하다는 남한의 협상 자세는 물론, 언어적인 문제로 오토 마이어와 KOC 간에 국기 문제에 이견을 보인 것을 비롯해 영어로 협상을 진행하며 IOC가 중재한 것 등이 브런디지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여전히 문제는 당사자들이 풀어야 했으며, 이제 서로 만난 상황에서 IOC는 결론이 필요했고 IOC가 더 이상 중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국기의 문제도 마찬가지였기에 두 제안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빠르게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공은 온전히 남한에게 넘어온 형국이 됩니다. 


2월 8일 IOC 집행위원회의 회의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28-8). 


‘한국 – 1월 24일 3명의 IOC 측 배석으로 남북 대표단의 회담. 2차 회담 2월 6일 브런디지 주재. 단일팀 참가로 거의 모든 안건 합의. 단 깃발 선택만 유보. IOC 위원장은 깃발에 남한 문양이 없으면 합의 어렵다는 남한 측에, IOC가 제안하는 선택 중 택할 것을 요구. 즉 올림픽 링에 ‘United Korean Team’을 적은 것, 또는 한반도 지도 가운데 올림픽 링을 표시한 것 중에 택하는 것으로. 북한은 이 제안에 동의했고, 이제 남측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음.’


남한에서 언론 기사의 뉘앙스는 미세하게 다릅니다. 1963년 2월 7일, 동아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28-9). 


“[올림픽 단일팀 국기 문제 미결 6일밤 로잔느 회담서] 브런디지는 IOC의 안을 북이 수용하는 반면 한국은 서울당국에 보고해야한다고 말한 것으로 밝혔다. 그리고 회의 10분 만에 폐회하였다고 했다. 귀국 보고회의에서 김진구는 ‘이번 회담에서 우리 측은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했다고’고 말하고 국가대신 아리랑을 채택했고 선수선발 원칙에도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으나 국기문제에 관하여서 남은 우리 측의 태극기를 주장한데 대해 북괴 측에서 언을 좌우하여 결론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8일 IOC 집행위에서 재론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용 자료



(28-1)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p. 58-60. 


(28-2)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 61. 


(28-3)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3. 1. 27.)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8-4)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 65. 


(28-5)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p. 69-70. 


(28-6)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 72.


(28-7)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p. 79-80. 


(28-8)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Session 1894-2013.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 Commission exécutive 1921-1984. 02-Procès-verbal-eng. Minutes of the Conference of the Executive Board of the IOC in Lausanne, Mon Repos. pg. 3. OSC, IOC. 


(28-9) 동아일보 (1963. 2. 7.) [올림픽 단일팀 국기문제미결 6 일반 로잔느 회담서]



[사진설명


몽-흐뽀 공원 저택 the Maison de Mon-Repos. 1922년부터 1967년까지 IOC 본부로 사용된 장소. 1963년 1월 24일 로젠 남북 회담과 이후 집행위원회가 열린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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