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독립적 올림픽 출전은 막아야 한다! (63.2-4)
1963년 1월 24일 남북한 로젠 회담은 남한이 의문의 1패를 당합니다. 자신만만하게 회담에 임했지만 북한과 IOC를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고, 남한은 준비한 전략을 써보지도 못하고 본전도 못 찾습니다. 미국의 우려가 틀리지 않았던 것이죠. 심지어 브런디지에게로부터 더 무거운 숙제를 받기까지 합니다.
IOC 집행위원회가 열리기 이틀 전인 2월 6일 브런디지는 남북의 대표를 불러다 최종적으로 정리합니다. 남한은 두 개의 단일팀 깃발 중 하나를 선택해서 알려주고, 앞으로 모든 협상은 양측 당사자들이 직접 진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북한의 입장으로는 이 두 요구가 모두 바라던 바였을 것이고 남한은 두 요구가 모두 부담이었습니다.
숙제를 안은 남한은 브런디지와 IOC의 요구를 이행해야 했습니다.
남한 측은, 특히 이상백은 로젠 회담 중 브런디지가 취한 입장과 결정에 당혹해했을 것이고 매우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간의 개인적 관계는 물론, 로젠으로 향하는 중간 미국에 들러 이상백과 월터 정은 브런디지에게 충분히 남한의 입장과 전략을 설명했고, 지금까지 그랬듯 브런디지가 남한의 입장에서 방어해주고 도와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브런디지는 매우 중립적이었고 최종적으로는 남한에게 깃발을 선택하라는 요구까지 하게 되죠. 설상가상 브런디지가 선택하라고 제시한 두 깃발들은 남한이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구상이었습니다. 미 국무부가 브런디지를 절대 믿지 말라는 조언이 기억나는 대목입니다.
1963년 3월 2일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편지는 개인적 서운함과 이 상황이 여실히 나타납니다 (29-1).
‘개인적인 질문임. 우리와 IOC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듣고 싶음. 우리가 시카고에서 만났을 때 우리의 마지막 기대였던 태극과 올림픽 링의 심벌을 당신이 확실하게 이해하고 이를 제안하여 주장할 것으로 믿었음. 남한의 주장을 밀어붙이지 말고 첫 두 안건 (단일팀, 국가)에 동의의 가능성을 열어두라 했음. 깃발의 경우 당신이 주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일단 뒤로 물러났음. 우리는 태극기를 주장하려 했지만, 당신은 시카고에서 이에 대해 짜증을 냈고, 그래서 당신의 주장대로 태극과 올림픽 링을 북한이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음. 우리가 공식적으로 IOC에 우리 분위기를 알리기 전에 당신의 생각을 알려주기 바람. 도쿄 올림픽에서 국기와 국가를 사용하지 않으면 모를까, 남한 국민들은 이 상태로 한반도 단일팀을 수용할 수 없을 것임. 현재 남한은 국가주의가 강력하며, 지난 60년의 역사를 보건대 반공주의도 팽배하여 이를 쉽게 버릴 수 없음. 당신의 의견을 기다림.’
이 편지에 대해 3월 13일 브런디지는 이상백에게 단호한 입장의 편지를 보냅니다 (29-2).
‘3월 2일 편지 받았음. 다시 강조하지만, 규정 상 한반도에서 단일팀이 아니라면, 북한은 독립 팀으로 참가하게 될 것임. 이 결정은 가능한 최대로 연기된 것이며, 우리는 규정을 어길 수 없음.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있으며, 북한의 국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한의 국기를 인정해 달라는 것은 불가능함. IOC는 국기와 국가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에 미련이 있지만, 그럼에도 규정을 바꾸었음. 게임은 국가 간이 아닌 개인 선수간의 경쟁임. 국기가 없어지면 과도한 국가주의도 줄어들 것임. 남한 국민과 정부가 단일팀을 원한다면 한반도기를 깃발로 사용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음. 그래서 국기를 없애고 깃발만을 사용한 단일팀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임. 내가 개인적으로 한국의 사정을 잘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더 이상 할 수 없음. 규정에 따르면 한국은 한 팀으로 나와야 하고 남한은 결정해야 할 것임. 이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임. KOC가 우리 제안을 따르기 바람.’
이 편지에 이상백은 3월 23일 답장합니다 (29-3). 편지는 남한 측의 이해를 도왔으며, IOC 요구를 수용할 것이라고 적습니다.
이상백과 브런디지 사이에 편지가 오가는 동안 로젠 회담의 결과에 대해 남한 측은 여전히 태극기를 사수하려는 노력이 진행됩니다. 3월 14일 최고회의 의장, 외무 국방위원장 및 군사위원장에게 보내지는 자료는, 올림픽 단일팀에서 태극기를 주장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를 적고 있습니다 (29-4). 그리고 태극기가 단일기로 채택되지 못하는 경우 태극기에 올림픽 링이 들어간 대안이 건의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합니다.
남한 측의 여유로운 상황은 그러나 하루 만에 뒤바뀝니다.
외무부가 3월 15일, AP 통신으로 보도된 오토 마이어의 인터뷰 내용에 놀란 것입니다. 남한이 한 주 안에 깃발을 선택하지 않으면 남측이 IOC의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이해하고 북한의 독립 출전을 허용할 것이라는 보도였습니다 (29-5, 29-6)). 외무부는 주 제네바 공사에 급 타전하여 진위여부를 알아보게 합니다.
주 제네바 공사는 보도가 사실임을 확인시켜줍니다 (29-7). 그러면서 로젠 회담 후 2주 내로 답신하기로 했으나 1개월이 지나도 답이 없어 편지할 차였으니, 공사 자신에게 방법이 있으면 KOC에 속히 IOC 뜻을 전해주기를 요청했다고 적습니다. 비록 마감이 한 주로 한정된 것은 아니나 오토 마이어는 매우 불편한 심기였으며, 공사는 KOC가 최단 시간 내에 답신할 것을 요청합니다.
주한 미 대사관도 이 사안에 대응합니다. 3월 21일 미 대사관 하우원츠 3등 서기관은 외무부 국제기구과장을 방문하여 단일팀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견해를 전달합니다 (29-8). 북한의 단독 참가는 그들이 승리했다는 선전 수단으로 이용될 것이며, 자신들의 합법성을 주장하고, 분단국가에서 단독으로 참가하는 첫 사례로 기록될 뿐 아니라, 북한이 자유세계에서 최초로 그들의 국기를 들고 대회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우려의 견해였습니다.
이제 북한의 독립적 올림픽 참가는 깃발 선택의 문제를 뛰어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3월 말과 4월 초에는 긴급하게 올림픽대책위원회가 소집됩니다 (29-9). 그리고 이상백과 월터 정은 4월 16일 스위스로 출발하게 됩니다 (29-10).
로젠 회의 후 IOC의 요청이 기한을 정한 강제라기보다 여느 때와 같이 여전히 남한의 선택에 달렸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남한 정부는 당황합니다. 그리고 IOC의 제안과 미국 대사관의 견해를 급히 실행하게 됩니다. 남한 정부는 이 문제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그래서 태극기를 지키는 문제를 넘는 북한의 독립적 출전을 막아야 하는 상황임을 깨닫습니다.
먼저 협의를 위해 브런디지를 만나야 했습니다 (29-11). 그러나 브런디지의 외유 일정으로 일정을 조정하지 못합니다 (29-12). 이상백과 월터 정은 제네바에서 4월 19일 오토 마이어를 만납니다. 이 만남에서 이상백은 KOC가 지난 네 번의 올림픽 경험이 있으니 단일팀의 선수단장은 남한에서 나오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29-13). 그리고 오토 마이어와의 만났던 얘기를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9-14). 편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4월 19일 나와 월터 정이 오토 마이어를 만나 도쿄올림픽에서 한국문제를 논의했고 그 내용을 알리고자 함. 남한 국민은 독일 방식으로의 국기 적용이 안 되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어 함.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제안을 수용할 것임. 깃발은 위쪽에 올림픽 링, 밑에 KOREA라고 쓰인 것을 오토 마이어에 제안했고 사무총장은 완전히 동의함. 당신도 동의할 것으로 믿음. 우리는 5월 15일 홍콩에서 북한 대표단을 만나기로 했음. 대표단은 3명으로 하며, 대신 그쪽에서는 기술적 문제로 몇 명이 더 올 수도 있음. 회의 결과는 IOC에 보고될 것임. 오토 마이어가 일정을 전달할 것으로 믿음. KOC는 지난 네 번의 올림픽 경험이 있으니 남한에서 선수단장이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음. 추가로 만약, 이번 홍콩 회의를 포함해 이후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이에 대한 조정과 결정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IOC에게 맡기기로 했음. 지난 1월 북한과의 만남은 IOC가 중재해서 좋았음. 그러나 홍콩은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봐야 함. 그들의 전술을 보건대 우리의 결정은 그 이후에 내려야만 할 것임.’
오토 마이어도 이상백과 월터 정을 만나 나눈 내용을 4월 22일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9-15). 편지는 올림픽 링 아래 KOREA로 적는 깃발에 동의했으며, 북이 거부할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남한은 여론과 언론에 부담을 느끼며, 그렇지만 않다면 IOC의 모든 제안을 받을 것이라 했다고 적습니다.
남북한 단일팀 깃발은 이렇게 1963년 4월 19일에 확정됩니다 (29-14, 29-16). 그리고 이렇게 5월 15일 홍콩회담도 결정됩니다.
(29-1)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3. 3. 2.)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9-2) 브런디지가 이상백에게 보내는 편지 (1963. 3. 13.)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9-3)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3. 3. 23.)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9-4)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p. 119-120.
(29-5)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 121.
(29-6) 동아일보 (1963. 3. 15.) “단일팀용 깃발 수용거부, 내주까지 결정토록. IOC 사무국 한국위에. 사무국장 오토 마이어는 한국이 국기안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북한으로 하여금 전한국을 대표하게끔 허용할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29-7)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 122.
(29-8)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 123.
(29-9)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p. 124-125.
(29-10)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2 1963. 1-4) pp. 126-127.
(29-11)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전신 (1963. 4. 6.)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9-12) 브런디지가 KOC에 보내는 전신 (1963. 4. 8.)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9-13) 이상백이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 (1963. 4. 21.)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9-14)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3. 4. 21.)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9-15)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3. 4. 22.)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9-16) 국립외교원. [L-0002-05/1263/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 문제. 전4권 (V.2 1963. 1-4) p. 3.
‘올림픽 링과 KOREA’ 1963년 4월 19일 이상백과 월터 정이 제네바에서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와 합의에 이른 남북한 단일팀 깃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