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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군가의 위로 Aug 27. 2020

모든 그릇은 깨지게 되어 있다.

제 소명을 다 한 마음



며칠 전 주문한 그릇이 드디어 왔다. 새 그릇을 닦으려는 찰나에 도자기로 된 주방세제 용기가 금이 가더니 깨졌다. 똑, 하고. 기다리던 선물이 오면 곧 원치 않는 소식이 뒤따라 오는 것 같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같이 온다고 한다는 옛 말이 그래서 있나 보다.


머리카락이 붙은 줄 알았더니 금이 가 있었던 세제통. 갑자기 뿍 깨졌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깨지지?


새로 산 그릇은 내 취향에 딱 맞아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반면 새 주방세제 용기를 찾아보는데, 영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주방세제 용기가 뭐라고 그냥 아무거나 사면 되지. 나는 꼭 이런 자잘한 부분에서 마음에 꼭 맞는 것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래서 며칠이고 인터넷 세상을 헤매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찾으면 기쁜 마음으로 택배 상자를 기다리고,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구입을 미루곤 지내곤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지도 없이 한참을 길을 헤매다가 고개를 딱 들었을 때 원하는 목적지를 발견하는 순간. (그 기분을 일상에서도 느끼고 싶은 마음인 건가?) 그 기쁨을 기다리며, 좋지 않은 일 뒤에는 그로 인한 즐거운 순간도 오리라 믿는다. 인생사 새옹지마.


드디어 첫 개시한 그릇. 묵은지 김치볶음밥과 내 마음대로 크림라비올리를 했다.


문득 도자기가 깨진 것을 보고 있자니, 몇 년 전 이모부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몸도 마음도 피로에 찌든 어느 날이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던 이모부께서는 무심하게 툭 말씀하셨다. 너무 애쓰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다는 말을 덧붙이셨던 것 같다.


모든 그릇은 깨지게 되어 있다.


그 무렵 나는 번아웃에 빠져있었다. 부지런한 한국인 성정에 대충 살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전형적인 한국인인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항상 열심히 살아왔다. 딱히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주어진 일이 있으면 빨리 처리해야 속이 편했고, 할 일이 없으면 뭔가 불안한 마음에 일을 찾아서 하는 성격 탓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딱히 공부는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그로 인해 얻는 성취가 좋았다. 그러다 보니 친척들이 모인 가족 모임에서는 꼭 나처럼만 하라는 말이 사촌동생들에게 흔히 가해지는 압박이었다. 그 모습들을 봐온 이모부는 번아웃 상태에 빠진 나를 정확히 알아보셨다. 그래서 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괜찮다며, 둔감력을 키우라고 자주 말씀해주셨다. 어떤 날은 저녁 식사자리에서, 어떤 날은 문자 메시지로.


공짜 없다, 둔감력을 키워라, 모든 그릇은 깨지게 되어있다. 이모부는 지금 내게 필요한 말을 적절한 시기에 해주신다.


오랜 시간 제 역할을 해온 그릇은 어느 순간 금이 가고 깨어진다. 사람의 마음도 그런 것 같다. 외부의 압력이 작용해 깨어지는 일도 물론 있지만, 충분히 애쓴 마음이 스스로 깨어지는 일도 더러 있다. 번아웃이 온 나는 내 마음이 깨진 이유를 찾기 위해서도 열심이었다. (제발 자잘한 건 대충 넘겨라..!) 왜 내가 힘든 건지, 누구나 이런 건지, 어떤 압박 때문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물론 딱 맞는 이유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효과 직빵인 약을 찾지도 못 했다. 지친 채로 흘러가다 보니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런데 외부의 압력이 없이도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세제통을 보며 깨달았다.



가만히 되뇌어본다. 멀쩡히 있던 세제통이, 마음이 갑작스레 깨어진 이유를 찾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 제 자리에서 묵묵히 제 쓰임을 해오는 시간들이 누적되면서 자연스레 소진될 수도 있으니. 그저 마음에 꼭 드는 새로운 용기를 찾으면 된다. 그릇도, 마음도.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쥐면 된다. 마음에 꼭 드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새 세제통을 찾기 위해 인터넷 쇼핑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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