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탁에 앉았지만, 밥알인지 모래알인지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하루 종일, 낯선 어린이집에서 마주했던 그 낯선 풍경들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출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센터의 특별한 아이 ‘제이콥’을 잠시 돌보게 되었다. 아이가 등원하기 직전, 4-5세 반 담임 선생님은 내게 몇 가지 중요한 당부를 전했다.
“제이콥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하고, 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OK’나 ‘No’ 정도는 할 수 있고, 간단한 지시에는 반응을 보일 거예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으려고 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막아주셔야 해요. 기도가 막힐 수도 있고 입이 상할 수도 있으니 입에 넣은 것은 반드시 전부 꺼내셔야 합니다. 저번에 배탈도 났었고.”
나는 아이가 발달이 조금 더딘 편이라고 하니, 애기들이 장난감 등을 입에 무는 정도겠거니 상상했다. “걱정 마세요”라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지만, 담임 선생님의 미간주름이 깊어질 뿐이었다.
어린이집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울창한 숲 공원의 입구에 위치했고, 넓은 마당 안쪽에는 아이들의 자연 놀이터가 되어주는 자그마한 언덕이 있었다. 돌계단으로 이어진 언덕 위아래로는 으리으리한 오두막 두 채가 어린이집 건물로 운영되고 있었다. 푸른 하늘마저 병풍처럼 펼쳐진 그 꿈결 같은 공간에서,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여기, 이 아이가 우리 반 제이콥이에요.”
선생님의 손 끝을 보니, 덩치가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까무잡잡한 소년이 센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얼른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며 말을 건넸다.
“안녕? 네가 제이콥이구나. 나는 흐름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오늘 우리 같이 신나게 지내보자.”
제이콥의 눈동자가 어색하게 떠돌았다. 그리고 곧, 나는 ‘놀라울 노(No)자’라는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아이는 표정만 느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동해와 서해를 번쩍였다. 그리고 “엇!” 하는 찰나에 아이 손에 닿는 모든 것이 입속으로 사라졌다. 마당의 모래밭은 물론이고, 흙바닥, 나무, 장난감 통, 심지어 하수구 속까지 제이콥의 손이 쉴 새 없이 휘저었다. 모래, 흙, 진흙, 구정물, 돌멩이, 나뭇잎, 나뭇가지, 이름 모를 열매, 버려진 플라스틱 조각, 장난감, 연필, 크레용, 블록, 상자, 책… 입에 넣지 못하면 차가운 벽면이나 의자, 칠판까지 혀로 핥았다. “No!”와 “Stop!” 외에는 아이를 즉각적으로 말릴 만한 그 어떤 우아한 표현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멘붕!
어찌 물건이나 식물뿐이겠는가. 개미는 그렇다 쳐도, 지렁이, 그러다 하아… 문제의 지네. 호주의 지네는 새끼 전갈만큼이나 굵고 크다. 시커멓고 마디가 번들거리는 성성한 지네가 제이콥의 손과 입 사이에서 꿈틀거리며 으스러졌다. 몸이 끊어지고 내장이 드러나도 버둥거리는 벌레의 다리들이 아이의 입술을 눌러대는데… 아득하게 이어지는 같은 장면의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그 끔찍한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살아나, 집에 돌아와서도 밥을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광경이 비위를 건드릴지언정 화가 날 일인가? 내 안에 들끓는 화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도 밥을 못 넘겨 드는 배고픈 짜증인가? 아니다. 솔직히 속이 울렁거리게 하는 것은 그 센터 선생님들의 너무나 익숙한 듯한 태도이다.
“부욱!”
제이콥이었다. 까짓 방귀지 뭐. 냄새가 은은히 퍼져나갔다. 곧 근처에 있던 담임 선생님이 내게 빨리 제이콥을 데리고 화장실로 가라고 지시했다. 제이콥은 자주 옷에 실례를 해버리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기저귀도 완강하게 거부해서 매번 애를 먹는다고 했다. 먼저 내가 제이콥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이콥, 혹시 지금 변이 보고 싶니? 우리 같이 화장실에 가 볼까?”
“No!”
하루 종일 처음 들어보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아이의 의사는 또렷했다. 다시 한번 확인해도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지켜보던 담임 선생님이 답답한 듯 “그냥 아이를 달랑 들고 가세요.” 했다. 덩치가 작은 나로서는, 아무리 아이라지만 그 발버둥과 묵직한 버팀을 이기고 다시 아이를 일으켜 앉히는 것조차 어려워 땀을 뻘뻘 흘렸다. 결국, 센터 선생님 한 분이 나서서 제이콥을 억지로 붙잡아 화장실로 끌고 가다시피 했다. 선생님의 옷 목덜미가 멱살잡이라도 한 듯 아래로 늘어져 흘렀다. 하지만 노력이 허무하게도 아이는 다시 한번 “No!”라고 짧게 외치고는 그대로 화장실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턱! 그 순간 나는 숨이 막혔다. 마치 나에게 주어진 임무와 아이의 간절한 의사 사이에 꽉 끼여버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짧은 순간 나는 “No”라는 단어가 지닌 차갑고 단절적인 느낌, 그리고 강렬한 육체의 거부감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다 큰 내가 그리 느꼈는데, 살도 정신도 훨씬 보드라울 아이들은 오죽할까. 아... 폭력이었구나. 나는 어리석게도 폭력이 보호인 줄 알고 가담했구나. 내가 퇴근 후에 지금 밥 한 술 못 뜨는 이유는 내 위선이 역겨워서이구나. 그리고 문득 한 개의 질문이 뼈아프게 머릿속에 울린다.
‘나는 오늘 누구의 편에 섰는가?’
제이콥이 나에게 맡겨진 아이라면 나는 그 아이의 보호자이다. 그런데 나는 교육자라는 타이틀만 달고 선생님들 꼬봉짓하며 시키는 일하는 용역 노릇이나 했지, 아이의 보호자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니, 완전히 잘못했다. 편견은 강하다. 강자는 보호가 필요 없다. 보호는 약한 존재들에게 필요하다. 나는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옳았다. 아이를 편견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제이콥. 내 가치관이 똑바로 서 있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우선인지 선명하게 판단하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성숙한 어른으로서 행동하지 못하고 발달이 느려서 미안하다.
특수 아동과의 교감이라는 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아이의 개인적인 의사, 주도성과 자율성뿐만 아니라, 센터의 규칙과 안전, 위생 또한 존중해야 한다. 특별히 눈을 잘 맞추지 않고 시선이 불안정하거나 말로 표현이 어렵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특징이 있는 아이들은 더욱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적어도 많은 어른들의 머릿속은 그러하다. 눈에 보이는 현상 이면의 욕구를 파악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아이가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어른들은 종종 눈앞의 현상에만 사로잡혀 버린다. 어떻게 해결할까? 어쩌면 아이의 문제는 아이들끼리 순수하게 답을 찾아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며 마지막으로 오늘 하루 중 가장 평화로웠던 장면을 떠올린다.
제이콥이 어린이집 마당 한쪽에 설치된 해먹에 편안히 누워 있었다. 그때, 다른 한 아이가 다가와 제이콥이 누워 있는 해먹을 부드럽게 밀어주기 시작했다. 제이콥은 그 아이의 얼굴을 한번 확인한 후, 그 움직임에 몸을 맡긴 채 그림 같은 하늘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해먹을 밀어주던 아이는 그 자체가 신나는지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누구냐고 묻는 내 질문에 아이는 자신을 소개하며 “저 제이콥 알아요.”라고 말했다. 잠시 후, 그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해먹 당기기 놀이를 시작했다. 제이콥의 무표정했던 얼굴은 연신 맞은편 아이를 힐끗거렸고, 왠지 모르게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개구진 기운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역시 해맑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제이콥이 아무것도 입에 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앉기가 바쁘게 다른 곳으로 가버리지도 않았고,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아이 곁에서 여느 아이들처럼 편안하게 놀고 있었다. 그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노는 데는 아무런 규칙도 없었고 위험도 없었다. No도 없고 stop도 없고, 억지스러운 질문도 없었다. 지나친 친절도 지나친 경계도 없었다. 불안도 걱정도 없었다. 그저 함께 노는 것. 아이들의 얼굴은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더없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제이콥과 나의 장면들을 돌아본다. 돌멩이로 함께 놀아줄걸, 같이 모래성을 지을걸, 그저 따뜻한 손길로 아이의 머리를 한번 더 부드럽게 쓰다듬어 줄걸. 부드러운 웃음, 부드러운 손길, 부드러운 눈빛이면 충분한 일에.
내 입에 무수히 든 후회 섞인 말, 말, 말들이 모래처럼 버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