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9일 수요일
선착장 대합실로 이어지는 자동문이 열리자 아늑한 공기가 훅하고 밀려 들어왔다. 진작 셔터를 내린 매표소 앞 꽤 많은 수의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고 그 중 한 테이블에 캐리어를 옆에 둔 아저씨 한 분이 앉아계셨다. 벽쪽으로 붙은 길쭉한 벤치에 드디어 어깨를 짓누르던 짐덩어리를 내려놓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아무래도 가스를 사 와야 할 것 같다며 남편은 선착장에서 20분은 더 걸어가야 있는 주유소로 향했다. 고새 멀찍이 있는 둥그런 테이블에 아저씨 둘이 들어와 앉아 계신 것을 보고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배낭 맨 위 칸에 넣어 놓은 주머니칼을 기억하란다. (o_o ?)
남편이 자리를 비운 후 대기실엔 적막이 흘렀다. 걱정과는 다르게 아저씨들은 다들 고개를 젖힌 채 조용히 눈을 붙이고 계셨다. 그래도 살짝 긴장이 되기는 해서 아저씨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벤치 구석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이곳에서 3시간은 족히 더 보내야 한다. 예상대로 이곳에 와이파이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데이터를 아끼기 위해 핸드폰도 들여다보지 못했다.
쑤시는 무릎을 주무르며 얼마나 더 앉아 있었을까 마침내 가스를 들고 남편이 등장했다. 재킷 위에 잔뜩 맺혀있는 물방울들을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어느새 밖에 부슬비까지 내리고 있었나 보다. 한 숨도 못 돌리고 또 그 먼길을 비까지 맞아가며 홀로 다녀온 남편의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차올랐다. 그러나 또 쉴 새 없이 곧장 야외에 있는 벤치로 향하더니 사온 가스를 버너에 연결해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얼른 따라 나가 패키지를 뜯고 먹을 준비에 돌입했다. 물만 넣으면 뚝딱하고 볼로네제 파스타와 매쉬포테이토를 맛볼 수 있다니. 쪼글쪼글한 면과 가루 상태의 감자를 보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예상외로 맛이 나쁘지 않아 눈이 동그래졌다. 뜨끈한 음식을 입에 집어넣으니 점차 몸이 데워지며 동그래졌던 두 눈은 다시 살짝 풀릴 정도로 나른해졌다.
노르웨이가 부자 나라이긴 한가보다 실감을 했던 점 중에 하나는 무료 공중 화장실의 상태였다. 맥주를 파는 비어가르텐의 화장실 입구에서조차 동전 놓는 접시를 볼 수 있는 독일에 오래 있어서인가, 일단 많은 곳이 여전히 무료라는 점에 놀랐고, 풍족한 휴지는 물론, 어디서나 팔팔 끓을 듯이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점에 두 번 놀랐다. 집을 나선 지 12시간이 넘은 시각, 뜨끈한 물로 세수를 하고, 양치질까지 마치니 잠시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배도 부르겠다, 한껏 상쾌해져서 기분 좋게 남은 한 시간을 어떻게 때우지 고민하던 찰나, 남편의 고개가 갸웃했다.
근데 사람들이 좀 전에 다 캐리어 들고나가던데?
주변에 차들도 싹 다 사라졌어. 뭐지?
대기실 안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 꽤 있길래 살펴보니 차를 타고 페리로 이동하려는 사람들은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그 안에서 대기 중이었더랬다. 그런데 대기실 아저씨 3인방을 포함해 바깥의 차들도 싹 다 사라져 있는 것이었다. 이것도 비행기 탈 때처럼 어딘가로 좀 미리 가서 체크인 같은 걸 해야 하는 건가?
아무리 시간표를 확인해봐도 이 시간대에 출발하는 페리는 우리가 탈 새벽 1시 모스케네스행 뿐이었다. 눈덩이를 굴리듯 불안함이 점점 불어나 아직 30분이 남았음에도 서둘러 가방을 들쳐 매고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깜깜한 항구 앞엔 커다란 페리가 입을 벌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차들을 천천히 뱉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을 씻고 봐도 줄 서 있는 사람들이라든가 아무튼 사람이 탈 만한 곳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마음이 급해지니 소심함도 이겨내고 근처에 주차되어있던 자동차 앞으로 덜컥 다가갔다.
excuse me!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대답했다. 짧게 상황을 설명하니 친절하게도 시간표까지 다시 한번 확인해주며 자신은 지금 내리는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지금 저 페리 말고 다음 것 그러니까 1시에 출발하는 페리를 타면 된다고 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12시 반에 출발하는 다른 배를 탄 것일 거라면서. 내가 본 시간표에선 찾아볼 수 없는 배였지만, 알게 뭔가. 이후에도 내가 검색해 두었던 것과 다른 일이 벌어지는 상황은 여행 내내 왕왕 펼쳐졌으니. 그래 모든 걸 이해하려 들지 말자…
잠시 뒤, 미리 구매해 둔 티켓 큐알코드를 금방이라도 보여줄 수 있게 화면을 켜 손에 들었다. 집어삼킬 듯 시커먼 바닷물이 너울거리는 모습이 아래로 훤히 드러난 격자 철제 데크를 지나 자가용과 캠핑카, 거대 트럭들로 가득한 배 위에 올라섰다. 그러자 아저씨는 확인은 커녕 투박한 손으로 볼펜이 대롱대롱 매달린 종이차트를 내밀었다. 이름과 전화번호 등 간단한 정보를 적어 돌려주니 계단실 문을 가리키고 올라가란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 라운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여기저기에 모로 누워 잠들어있는 탑승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내릴 때까지 내내 깜깜할 것이라 바깥 풍경을 1도 볼 수 없음에도 왜인지 뷰를 염두에 두며 커다란 창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답답한 등산화를 벗어둔 뒤 앞좌석에 붙어있는 테이블을 열고 챙겨 온 몰스킨 노트를 꺼냈다. 첫 장에 정성스레 LOFOTEN 9.9.21 - 26.9.21 을 적고는 몇 자 더 적었을까 글씨가 점점 꼬부랑거리다 이내 순식간에 수마에 빠져들었다.
아으 추워.. 더 자고 싶다...
잠결에 내가 지금 페리를 탔다는 사실도 잊고 그저 좀 더 푹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꼬물거리며 덮고 있던 재킷 속을 파고드는데 주변에서 느껴지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퍼뜩 눈을 떴다. 으슬으슬한 기운이 기분 나쁘게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느새 앞에 앉아있던 커플은 온데간데없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빠른 속도로 짐을 챙겨 사라지고 있었다. 여행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푹신한 침대로 몸을 던지고 싶을 만큼 차오르는 피곤함을 겨우 누르고 여직 비몽사몽 한 남편을 깨워 황급히 짐을 챙겼다. S자 고리가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아 스트랩을 여러 번 힘주어 끼워 넣다 보니 손가락 끝이 부은 듯이 아려왔다. 얼떨떨한 얼굴로 급히 계단을 내려와 보니 빼곡하게 세워져 있는 차들이 당장이라도 도로로 빠져나갈 듯 드릉드릉 시동을 걸고 있었다. 사람이 안전하게 나갈 만한 길이 보이지 않아 주춤거리고 있는데, 마침 앞서 걸어 나가시는, 한쪽 어깨에 대충 책가방을 걸친 한 아저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책가방은 커다란 대구포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바람에 반쯤 열린 채였다. 이 시간에 저런 편안한 차림으로 도착한 것을 보면 이곳 주민이신가 보다 싶다가도 누가 봐도 기념품 같아 보이는 대구포를 사 가지고 오신 모습에 다시 관광객이신가 하고 어리둥절했다. 아무튼 아저씨를 따라 졸졸 비좁은 자동차 틈새를 비집고 나가 무사히 육지에 발을 내디뎠다.
새벽 네시. 장장 18시간 동안 이동한 끝에 드디어 도착했다. 로포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