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9일 수요일
2021년 9월 9일 수요일, 뮌헨 날씨는 더웠고 보되 날씨는 쌀쌀했다.
양키, 유니폼, 노벰버
드디어 대망의 출발일. 정말 미스터리다. 어째서 항상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갈 땐 시간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고 마는지. 지난밤, 계획을 대폭 수정하게 되는 바람에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차를 렌트하지 않기로 정했기 때문에 오직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 보트, 페리로만 이동해야 하는 우리는 그날그날 어디를 갈지, 그때 탈 수 있는 버스가 있는지 확인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행선지 몇 곳 만 더 추가한 것뿐인데 원 계획과 바뀌는 날짜에 맞춰 시간표를 몽땅 다 다시 확인해야 했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이 계획표가 어긋날 것임을 알고 있다. 정확한 날씨를 예측하기 어려운 로포텐에서 어느 날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계획을 짜 두지 않으면 갈팡질팡 할 수밖에 없을 테니, 지켜지지 못할 것을 알면서 짜는 계획표인 것이다. 사실이 이렇다 보니 매일 밤 지친 몸을 뉘일 곳 또한 미리 정하지 못한다. 와일드 캠핑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가능한 조건의 장소를 찾는 일 결코 쉽지 않을 터라 어쩔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낯선 여행지에서 날이 저물었을 때, 당도할 포근한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이 주는 위안이 얼마나 크던가. 어쩌다 백패킹의 매력에 반해 스스로 정해놓은 일정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모험가의 피라고는 1cc도 섞이지 않은, 하루 종일 침대 위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자격증 1급 소유자인 내게 이런 여행이 참 얼토당토 없게 느껴진다.
세 시간이나 잤을까. 그러다 보니 머릿속으로 다짐해 뒀던 기상 시간은 보기 좋게 어긋나 버렸고, 우리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채, 분 단위로 핸드폰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며 부디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이번 탑승 시간은 오후 한시쯤이니 여유롭겠다 중얼거렸던 어리석은 과거의 나여. 일찍 일어나 마지막으로(?) 마음 편한 우리집 화장실에서 볼 일을 시원하게 보고 출발하겠다던 야심 찬 계획 역시 턱도 없이 어그러졌다. 당장은 평온한 상황이래도, 사방이 훤히 열린 대자연에서 삽으로 땅을 파야만 볼 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까운 미래를 떠올리니 낭패감이 깃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일단 내일의 걱정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는 수밖에.
반복되는 창 밖의 단조로운 초록 평원에 넋을 놓은 채 S반에 실려가고 있던 도중, 핸드폰이 깜박이며 새로운 문자가 왔음을 알려왔다.
From Norwegian Airlines, We regret to inform that ….
노르웨이 비행사로부터, …소식을 알리게 되어 유감스럽습니다.
이 친숙한 문장의 시작은 매번 뭔가에 지원한 후 탈락을 알려올 때 가장 먼저 나를 맞아주던 불길한 글이 아니었던가. 비행이 취소라도 된걸까.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알고 보니 그저 이륙이 25분 정도 연기되었다는, 지금의 우리에겐 기쁜 소식이었다. 휴. 단지 25분이었지만 아슬아슬한 도착을 예상했던 우리에게는 금쪽같은 여유를 선사해 주었다. 졸였던 마음을 푹 놓으니 금세 공항에 도착했다. 체크인 카운터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처음 비행기표를 검색해 보던 때 비교적 저렴하고도 짧은 비행시간을 자랑하는 노르웨지안 비행사에 감탄했더랬다. 이내 내 몸집만 한 가방 두 개를 모셔가기 위해서는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아무튼 갓 배달되어 온 흠집 하나 없는 고운 가방을 제대로 들어 보기도 전에 함부로 다뤄지게 둘 수는 없었기에 가방을 부치기 전 래핑을 하기로 했다. 이미 대다수 사람들은 탑승수속을 마쳤는지 데스크 앞엔 진행 중인 한 팀을 빼고는 기다리는 줄이 없었다. 한편에 가방을 내려놓고 비장하게 바리바리 싸온, 집구석에 돌아다니던 커다랗고 길쭉한 비닐봉투들과 거의 다 쓰고 마지막 몇 겹만을 남겨둔 박스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 사이에 줄을 서야 하나 기웃기웃하며 다가온 일행을 먼저 앞으로 보내고는 어쩐지 마음이 급해진 우리는 빠르게 손을 놀려 가방을 빈 틈 없이 감싸고 테이프가 갈색빛 종이 파이프를 드러낼 때까지 둘둘 감아 고정했다. Fragile이 잔뜩 적힌 붉은 테이프로 단단히 포장된 가방이 무게를 재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졌다.
이번 여행에선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 여권 이외에도 미리 준비해 온 디지털 백신 패스까지 확인하고 나서야(직원은 큐알코드뿐만 아니라 접종시기와 2차 접종 여부까지 꼼꼼히 체크했다.) 컴퓨터에 우리 이름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인쇄용지가 마침 똑 떨어졌나 보다. 기계를 몇 번 달그락거리던 담당 직원이 조금 떨어져 있는 건너편 데스크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대신 인쇄를 해줄 수 있냐 부탁을 하는 듯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흘려듣고 있던 내 귀에 ‘양키, 유니폼, 노벰버’라는 전혀 연관도 맥락도 없어 보이는 단어들이 꽃혀 들었다. 응? 뭐지… 일단 인종차별에 민감한 n년차 유학생에겐 귀를 쫑긋, 눈을 부릅 치켜뜨게 하는 양키라는 단어. 사실 미국 내에서는 이 단어 자체가 그리 모욕적인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난 미국인이 아닌데? 여러 생각이 그 짧은 시간 내에 교차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표 하나. 소음이 많은 곳에서도 철자를 헷갈리지 않고 전달하기 위해 누구든 잘못 듣기 어려울 만한 쉽고 단순한 단어들을 알파벳마다 정해 놓은 포네틱 코드였다. 내 이름 YUN을 말하는 거였단 사실을 깨닫고 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래 걸려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무사히 내 이름이 적힌 티켓을 건네주는 직원에게 땡큐!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게이트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