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9일 수요일
청정구역 속 생선인간
오슬로를 경유해 두 번의 이착륙을 마치고 마침내 우리는 아담한 보되 공항에 도착했다.
저녁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수하물 찾는 곳 앞을 서성이며 강렬한 경고 테이프로 꽁꽁 묶여 눈에 안 띄기가 더 어려울 우리의 가방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몇 발짝만 떼면 공항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는 워낙 작은 공항이었기 때문에 마중 나온 이들 역시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행의 짐이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통 가방이 보일 생각을 하지 않자 한편에 있던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려는데 묘하게 이질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뭔가.. 이상한데?
그때 옆에 따라 앉은 남편이 마스크를 벗어 내렸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원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곳곳에 놓인 쓰레기통에는 홀가분히 버려진 푸른 써지컬 마스크들이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실내공간이었고 어림잡아 오십 명은 되는 인원이 밀집되어있는 것 같은데 괜찮은 게 맞을까 확신이 서지 않아 망설이는 나에게 "뭐해, 얼른 벗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곳은 대중교통이나 마트, 카페 등등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팬데믹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자연스럽게 생활하고 있는 코비드 청정구역임을 깨달았다. 겨우 1년 남짓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환경에 금세 적응이 되어버렸던 것인지 얼굴을 가리는 천조각 없이 당당히 마트에 들어설 때에는 한 껏 들뜨고, 감격에 겹기까지 했다.
컨베이어 벨트를 둘러쌌던 무리가 제 짐을 들고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몇 명만을 남겨두고 어느새 공항은 썰렁해졌다. 가방이 나오는 순간을 영상에 담겠다고 핸드폰을 들고 한참 대기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후다닥 어느새 저 안 쪽에 있던 다른 컨베이어 벨트로 달려간 남편이 이내 양손 묵직하게 다가오는 모습이 대신 담겼다. 제 소임을 다한 비닐을 뜯어내고 벤치에 어렵사리 기대 놓은 짐짝만 한 가방 둘을 내려다보자니 이제야 백패킹을 오긴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노르웨이 공기를 쐬기 전,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있었다. 북위 68도에 걸맞은 옷차림으로 갖춰 입고, 등산스틱이나 테바 샌들 같이 꺼내어 손에 쥐거나 가방에 매달 물건들은 꺼내고 대신 각자 기내에 들고 탔던 작은 배낭과 그 안에 든 짐들을 합치는 대대적인 재정비를 해야 했다.
같은 75리터 배낭이어도 차곡차곡 짐을 넣으면 앞, 옆으로 좀 더 많이 들어가는 피엘라벤 배낭에 비해 부피가 상대적으로 작은 룬닥스 배낭이 내 차지가 되었다. 옆면을 누르면 딸깍 하고 쉽게 잠그고 풀 수 있는 플라스틱 버클이 아닌 S자 금속 버클에 스트랩 고리를 끼워 넣어 벨트를 채우는 것이 특징인 룬닥스. 남편은 그 부분이 유독 더 튼튼하고 완성도 있어 보여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나는 분명 그 의견에 동의했지만 내 손가락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여행 내내 셀 수 없는 횟수로 가방을 조여 매고, 끄르기를 반복한 나머지 집에 돌아오는 길엔 눈을 감고도 척척 해내게 되었지만 그건 한참 뒤의 일이다.
아직은 서투른 손으로 매고 온 작은 배낭은 더 작은 덩어리로 압축해 접어 넣고, 휴대용 티슈와 핸드폰, 지갑과 같은 자잘한 물건들은 안팎의 재킷 주머니에 나눠 넣었다. 화장실에 간 남편은 혹시 모를 앞날의 원활한 식수공급을 위해 야무지게 3리터 휴대용 정수기에 물을 가득 채운 채 사뭇 당당한 걸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항 내에 설치된 현금지급기에서 노르웨이 크로네를 뽑았다.
여행 전 어떻게 하면 환전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백방으로 검색해 본 결과, 여유 화폐가 많지 않을 독일의 은행이나 환전소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노르웨이에서 직접 ATM기를 통해 찾는 것이 가장 유리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얼마를 찾아야 18일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을까 감이 잘 잡히지 않아 한참을 고심하다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여전히 열쇠 꾸러미와 지폐 사용이 일상적인 독일과는 다르게 노르웨이는 급속히 현금이 사라져 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그렇다는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어 그런가 보다는 했었지만 실제로도 여러 상점들에서 현금을 선호하지 않아 적잖이 놀랐다. 거슬러 줄 잔 돈이 없어 서로 곤란한 경우도 몇 번이나 있었으니. 조금 신기했던 건 마트에서 사용하는 현금 등록기였다. 흔히 보았던 서랍 형태가 팅- 하고 열리는 형태가 아니었고, 마치 자판기의 지폐 넣는 입구처럼 생긴 곳에서 지폐를 빨아들이는 좀 더 견고하고 투명해 보이는 시스템이었다. 동전은 길쭉한 직사각형 상자 안에 집어넣어 아래로 떨어지는 거스름돈을 받아가면 되었는데, 90년대 버스 위에서 요금을 내던 방식을 연상시켰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등 위에 배낭을 얹었다. 놀랍게도 출발 전날 훈련 삼아 집 근처 공원을 걸어 보았을 때 보다 몇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밤새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조금씩 추가시킨 짐들이 모이니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었나 보다.
와.. 망했다, 앞으로 정말 어떡하지?
막막한 한 숨을 지으려는데 눈앞에 보이는 인영에 또 헛웃음이 났다. 한 손엔 딱 봐도 묵직해 보이는 3리터 물
주머니를 쥐고, 머리 하나는 더 높이 솟은 가방에 주렁주렁 짐을 매단 뒷모습은 어떤 영화 속 생선 인간을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