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조가 그리운 이유
‘정의는 나약하고 공허하다. 이걸로는 그 어떤 악당도 이길 수 없다. 만약에 무자비한 정의가 있다면 기꺼이 져 줄 용의가 있다. 악당 역시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싶으니까. (중략) 마지막으로 악당의 입장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악은 견고하며 광활하다.‘
드라마 ‘빈센조’의 마지막 대사다.
정의가 나약하고 공허하다는 말에 동조했다면, 악은 견고하고 광활하다는 말에 공감하며 무릎을 쳤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은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현직 변호사가 쓴 책이다. 읽는 내내 법의 치부를 이렇게 공론화해도 되는 건지 걱정이 앞섰다. 현직 변호사가 이런 책을 집필하기까지 그는 정녕 예상되는 불이익이 두렵지 않았는지, 우려 섞인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변호사가 정의를 위해 나섰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봤다. 그것들은 흥미를 위해 만들어진 거짓이겠지만 주변인의 주변인을 모두 끌어모아도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없어 정확한 진실을 알 길은 없다. 확인할 방법 없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나는 최정규 변호사가 꽤 걱정스러웠다.
현실을 말하는 사람의 안위를 일개 독자가 걱정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이미 법원은 신뢰를 잃었다. 보는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법을 바라보는 편향된 시선이 씁쓸하게 느껴지는데, 시선을 받는 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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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보자. 빈센조의 말은 사실일까?
법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온갖 사회 규범. 사회의 정당한 정치권력이 그 사회의 정의 실현 또는 질서 유지를 위하여 정당한 방법으로 제정하는 강제적 사회생활 규칙’(출처 : 고려대학교 한국어 대사전)이라 나온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정의가 나약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 나약하고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의는 곧 법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켜놓고 정의만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법은... 있는 사람들 편이지.’
부끄럽지만 이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았다. 법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도 아니라서 였을까. 법은 내 편이 아니지만 아직까지 원고, 피고로 불린 적 없어 남의 일 이야기하듯 법과 판사와 검사를 싸잡아 욕하기만 했다.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지금 이만큼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법이 기여하고 있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법조인이 고압적이고 배려심이 없고 공감 능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책 속에 나오는 사례들을 보면 분통이 터지고 만다. 비록 직접 겪진 않았다 해도 어느 날 내가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에 더욱 크게 분노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결국 법이, 정의가 나약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현실이 되는 과정이 나약한 것이다.
일전에 한 방송에서 책에서 다룬 법적 절차의 까다로움, 불친절함, 폭력성과 비슷한 지적을 했을 때 '인력 대비 과도한 업무량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하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게 진실이건 변명이건 상관없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지 않을까.
엄연히 국민에 의해,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유 불문하고 대다수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행동을 했어야 한다. 인력이 부족했다면 충당을 했어야 했고, 배치에 불균형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바로잡았어야 한다. 그게 정의를 실현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있는 이유니까 말이다.
모든 판사가 불량 판결문만 쓰는 것은 아니다. 분명 모두가 감탄할 명품 판결문도 있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판사도 있다. 다만 그 수가 너무 적어서 우리가 눈 씻고 찾아야 봐야 한다는 점, 정말 특별한 사례라 널리 알려야 할 정도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다수의 판사가 명품 판결문을 쓰고 대다수가 신뢰하는 판결을 내리는 분위기라고 하더라도 소수의 불량 판결조차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법이다. 하물며 불량 판결이 다수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법 개혁은 정당성을 가진다.
장애인, 노약자를 비롯한 생활이 어려운 통칭 약자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법은 장벽을 높이고 권위를 세우고 때론 폭력적일 만큼 무심하다. 마치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고약하게 구는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그가 부담스러워하는 말로 '정의의 사도' 같다. 고약한 시정잡배들에게 정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주인공 말이다.
물론 저자는 여느 주인공처럼 늘 승리하지 않는다. 숱하게 부당한 판결과 싸웠고 다수 패소했으며 지금도 분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있음을 밝힌다. 그럼에도 승리하는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부디 정의가 승리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들이 내세우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간파해주세요.' 책장이 넘어가는 만큼 간절한 마음도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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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런 판결문은 판결의 이유가 충분하지 않아 불량이다’. ‘이런 제도는 이런 점에서 차별되니 고쳐야 한다’는 식으로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부당함을 주장한다. 기사로 접했다면 답답하다며 보다가 덮어버렸을 법한 이야기도 저자의 논리에 기대어 이성을 잃지 않고 똑똑하게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더불어 앞서 고백했듯 있는 자들을 위한 법이라고 생각했다면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것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는지 나는 한 번도 논리적으로 누군가를 설득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히 할 필요도 할 이유도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우리는 법에 기대어 나의 권리와 소중한 가치들을 지킬 수 있는 것인가에 항상 물음표를 달고 산다. 저자는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꾸는 방법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말한다. 촛불을 들고 대통령을 탄핵한 저력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사법부도 그렇게 변화시킬 힘이 있다고 말한다.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신이 아니다(제발 착각하지 마시길...). 그들도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도(하면 안 되지만) 잘못할 수도(더더욱 안 되지만) 있다는 전제를 깔고 국민이니까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 어떤 희망도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는 보편타당한 상식이 통하는 법이 집행될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큰 위안이 된다.
그 한 사람에 또 한 사람이 더해지고 지난 촛불 집회같이 마음이 모아지는 날을 그려본다. 그게 불량 판결문을 마구 써내면서 장벽을 높이는 것에만 애쓰는 그들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릴 힘이 되지 않을까?
“배운 사람들이 그러는 걸 보고 못 배운 걸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불량 판결문 중 <폭력과 존엄 사이> 인용문 중에서
대한민국에서 배움으로 정점에 선 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우리가 촛불을 들고서라도 알려줘야 한다.
우리 모두가 법을 둘러싼 가치 중
우선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안다면,
무엇이 잘못된 법이고,
판결의 어떤 공정에 문제가 있는지 안다면
법은 지금보다 믿음직해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식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과 일치할 확률이 높으므로 판사는 판결에 임할 때 법과 함께 상식을 고려하는 것이 옳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정말 약자를 보호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예외나 반대의 경우까지 들어가며 무조건 법 조항이라는 틀에 맞추려 노력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직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가치를 무리 없이 관철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좀 더 나은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법을 모르고 법이 무섭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법이 다수의 국민을 위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들만의 리그를 지키기 위한 곳이란 생각 또한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법이 뭐라고 하건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된다면 그 판결은 이상한 판결일 확률이 높다는 데에는 조금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얼마 전 남편과 부당한 판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강간과 폭행을 행한 가해자에게 심신 미약 상태였다는 점과 초범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 선고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딸을 키우고 있고, 늘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기에 분노와 답답함만 토로하다가 '조심하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게 조심한다고 조심이 되는 일인지, 분노하고 답답해한다고 판결이 바뀌는 일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법이 모든 범죄로부터 모두를 지킬 수는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이 재판 하나로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지켜줄 수 없고 없던 일로 만들어 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억울함만은 남지 않게 약자의 편에 설 수는 없었을까? 피해자와 가족들은 삶이 무너지는 일이 생겼는데 그렇게 밖에 판결할 수 없었던 것일까?
법이 그러하다는 이유로 판결을 내렸던 판사는 본인이 피해자였다면 혹은 본인의 자녀가 피해자였다면 이런 가정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이 피해자라면 본인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한 번만이라도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폭력을 가한 상대가 심신 미약 상태였으며 초범이었다는 이유로 그 무자비한 행동이 집행유예 정도로 용서가 되냐고. 그게 당신의 상식이냐고.
정녕 악은 악으로 처단할 수밖에 없다는 빈센조의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왠지 빈센조가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