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어린이라는 세계
책을 읽은 소감을 딱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는 무례한 사람이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책이 어려워서도 아니고, 불편한 이야기를 해서도 아니지만 문장을 곱씹어 읽는 게 조금 힘이 들었다. 힘든 이유는 내가 무례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였다.
여전히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이를 셋을 키우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핑계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한 건 아니니까 이 정도쯤은 괜찮다는 핑계로 나는 아이들을 무례하게 대하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둘째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엄마니까' '보호자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라며 무례함을 정당화시켰다. 엄마가 무례한 지 모르는 여섯 살은 하루 종일 혼만 났다며 또 한 번 통곡을 한다.
최근 충치가 심해진 둘째는 치과 예약을 앞두고 약이 오른 잇몸과 치아를 진정시키는 중이다. 덕분에 밥을 먹는 것도 양치를 하는 것도 전쟁이다. 밥은 이가 아프니 먹다 말고 도망가기 일쑤라, 억지로 먹이면 세 번에 한 번은 헛구역질을 한다. 먹기 싫다는 말 대신 이렇게 표현하는 거다. 그렇다고 안 먹일 수는 없으니 협박과 회유를 번갈아 하며 평소보다 적은 한 그릇을 겨우 먹인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먹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굶길 수도 없는 일이다.
밥은 기피하지만 과자를 먹고 싶다길래 양치를 꼼꼼히 하는 조건을 내걸고 허락을 했다. 며칠 전, 단 과자를 먹고 통증이 심해져서 힘든 경험을 한 이후로는 한동안 안 찾더니 다시 살만해졌나 보다. 맺힌 한을 풀 듯 한 시간 동안이나 과자를 먹고서는 양치 시간이 되니 딴 소리를 한다.
"아빠랑은 안 할 거야."
"엄마가 해주면 잘할게."
결국 아빠가 나오고 선수 교체를 했다.
"아~"
"아~해야지."
"아! 하라고!!!"
아팠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인지 과자 영향으로 이미 통증이 생긴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는 계속 양손으로 입을 막고 도리질을 친다. 협박도 하고 달래도 보고 했지만 요지부동이다. 화장실에서 20분 넘게 실랑이를 하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문밖으로 내쫓았다.
"엄마~ 잘못했어요. 잘할게요~ 엉엉."
"잘할 거야?"
"네에~"
"아~ 해."
도리도리.
"아~!"
도리도리.
"아~ 하라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됐다. 결국 보다 못한 남편이 아이를 눕히고 잡은 상태로 양치를 끝냈다. 처참한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Photo by Zahra Amiri on Unsplash
아이를 키운다는 건 현실이다. 사랑하지만 항상 사랑만 할 수는 없고, 존중하고 싶지만 모든 순간 존중할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어린이라는 세계]를 지은 작가에게 "애를 안 키워보셔서 그래요."라고 말한 사람들의 입장에 조금 더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곁에 있는 아이들을 말로 달래고 얼러가며 글을 쓰는 지금도 얼마나 존중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며칠 전 정혜윤 작가(저서로 '삶을 바꾸는 책 읽기'가 있다)의 북 토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지금과 다른 일이 일어나기 위하는 바람으로 글을 쓰는 게 작가가 해야 하는 일인 것 같아요.'
[어린이라는 세계]는 그런 의미에서 작가 본연의 의무를 다한 책이라 생각된다. 비록 무례하고 폭력적인 엄마라 읽는 내내 마음은 불편했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존중하고 조금 더 아끼는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에게조차 '천천히 해도 돼'라고 말할 수 없는 조급한 사람이라 너그럽게 기다리는 육아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책 속에 나오는 '천천히 해'하고 말하는 선배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아이들에게는 빨리하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된다. 빨리 먹어. 빨리 입어. 빨리 씻어. 빨리 치워. 빨리 가자.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작가의 말처럼 느긋하게 기다려줘야 하는 것들이 있다. 익숙해질 때까지 천천히 하라고 품위 있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도 맞다. 이 책 덕분에 (여전히 재촉을 하지만) 재촉하는 것과 재촉하지 않을 것에 관한 기준이 생겼다.
혼자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에는 재촉하지 않기.
막내가 혼자 신발을 벗고 마스크를 쓰는 것은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건드리지 않는다. 스스로 밥을 먹겠다고 꼬물거리며 노력하는 것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하지만 밥을 먹지 않고 딴짓을 하거나 정리 정돈을 하기로 하고 놀고 있으면 어김없이 재촉을 한다. "빨리 해!!"
법륜스님이 부모 강연에서 하신 말씀이다. 많은 부모가 기도 시간이 되면 '아이가 공부를 잘하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말 듣게 해 주세요.'와 같은 기도를 한다.
이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아이가 공부를 못합니다.' '아이가 아픕니다.' '아이가 말을 안 듣습니다.'와 같다며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우리 아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옳다는 말씀이셨다.
어린이의 개성은 그보다 복잡하게 만들어진다.
어린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과 스스로 구한 것,
타고난 것과 나중에 얻은 것,
인식했거나 모르고 지나간 경험이 뒤섞인 존재다.
어른이 그렇듯이
장단점을 평가한다는 건 부모의 눈높이로 아이를 내려다봤다는 말과 같다. 시선을 아이에게 맞춰놓고 보면 아이는 아이 그대로일 뿐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없다. 같은 의미로 모든 행동, 성격, 식성, 성향 등을 아이의 개성으로 인정하고 보면 장점도 단점도 나눌 이유가 없지 않을까?
보통 아이가 어떤 특징적인 면을 보이면 쉽게 닮은 꼴을 찾는다.
"나를 닮아서 운동을 못 해."
"당신을 닮아서 손재주가 좋아."
"저런 모습을 보니 할머니를 닮았나 봐."
부모 어느 쪽도 닮은 구석이 없을 때는 양가 친척까지 뒤져가며 공통점이 있는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고 보니 꼭 누군가와 닮아야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무의식적으로 닮을 꼴을 찾는 이유 중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나마 누군가를 닮은 모습이라면 설사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쩌겠어'하며 내려놓을 가능성이 높아서는 아니었을까 싶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나랑은 별개의 인격체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천지 차이라 나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미성숙한 어른이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자주 새기다 보면 아는 것을 넘어 수용하는 단계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어린이는 어른을 보고 배울 기회가 필요하다.
어린이는 가만히 서서 키만 자라지 않는다.
어린이에게는 성장할 공간이 필요하다.
공공장소에서도 어린이는 마땅히 '한 명'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배제할 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쪽으로
어른들이 지혜를 모으는 게 옳다.
얼만 전, 아이 둘을 데리고 브런치 카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이었고, 직장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제법 북적이는 카페 안을 둘러보다 창가 구석진 자리를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끝까지 가서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은 시끄러울 예정이고, 분주할 것이고, 무척 눈길을 끌 것이기 때문에 큰 홀을 가로질러 음식을 받아오는 동선이 길어지는 것쯤은 감수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가능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선택한 구석진 자리는 정말 불편했다. 일단 너무 추웠다. 난방이 중앙 홀 기준으로 되고 있어 창가는 외풍까지 들어와서 아이들이 외투를 벗고 있기에 무리가 있었다. 음식뿐만 아니라 여분의 수저와 포크, 아이들 식기를 받기 위해 다시 홀을 가로질러 카운터에 가야 했다. 또한 물을 가지러 가야 했고, 냅킨을 가지러 가야 했고, 빨대를 가지러 가야 했고, 물티슈를 가지러 가야 했다. 홀의 끝과 끝까지 대체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던지 그 사이 뜨거웠던 수프는 다 식어버렸고, 나는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으며, 아이들은 자리를 비운 엄마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불안해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카운터 가까이 혹은 홀 중앙에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자리로 선뜻 옮기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과 비슷한 목소리로 톤을 높여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도 많다. 사람들은 목소리가 큰 어른에게는 인상을 찌푸리긴커녕 다툼이라도 일어날까 시선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소란스러우면 다들 아이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고, 곁에 있는 엄마를 '맘충' 보듯 쳐다본다.
아이들이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어도 주변에 피해를 주는 게 없는지 살피게 되는 이유가 있다. 우리로 인해 다른 아이와 엄마들까지 싸잡아 의식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맘충'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한 상황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 허락된 자유와 공간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 주변에는 담배를 피우는 어른이 있다.(한적해서 차 세워두고 흡연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도심에서 차량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거의 없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 하굣길도 안전하지 않아 등하교 알림 시스템부터 안심 추적장치까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장비들이 필요하다. 집 밖은 온통 아이들이 조금만 주의를 놓쳐도 위험한 상황이 즐비하다. 오죽하면 외출하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조심해'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일기예보로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오늘은 산책을 나가도 될까? 오늘은 공원에 갈 수 있을까? 아이들은 미세먼지와 싸우며 자유를 찾을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세먼지가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이번 엔 코로나가 찾아왔다. 이젠 집 밖에 나가는 자유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껴안을 자유도 빼앗겼다. 대체 아이들은 어디에서 자유를 누리고 어떤 성장을 할 수 있는 걸까?
아이가 자라는 곳이 집과 학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공공장소의 예절을 배우려면 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지키는 어른들을 보면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사회성을 가지려면 또래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몸도 적절히 사용하고 기분 좋은 신체 접촉과 기분 나쁜 신체 접촉도 알아야 한다.
어른들은 의지에 따라 만남을 선택할 수 있지만, 약자라는 이유로 너무 쉽게 아이들만 제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에게서 빼앗은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Photo by MI PHAM on Unsplash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점심을 먹고 놀이를 하다 보면 별것 아닌 일에 아이들이 싸우고 울음을 터트리고 짜증을 부리는 시간이 온다. 이때는 왜 싸웠지는 따지지 않는다. 매번 비슷한 이유로 싸우기도 하지만 이유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은 딱 한 가지, 낮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졸리면 아이들은 쉽게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고 속상하고 운다. 이때는 빨리 윽박질러서라도 재우는 게 최선이다.
책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너무 무시하고 재운 것은 아닐까?'
말을 못 하는 네 살도, 충분히 억울함을 아는 여섯 살에게도 나는 똑같이 군다.
"시끄럽고 빨리 자."
이럴 때 존중이란 어떤 것일까? 왜 울었는지 상황을 살피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러고 나서 낮잠을 권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데 말이다. 맞는다고 쳐도 그렇게 행동하느냐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넉넉한 인품이 아닌 엄마는 울면 얼른 재워서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무척 폭력적이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했지만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 내일이 되면 또 윽박질러 낮잠을 재울 것이다. 매 순간 충분히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는 않는 것은 문제일까? 매 순간 무시하는 건 아니니까 문제가 아닐까?
실제로 잠이 와서 다툼이 커지는 것이 맞다. 이럴 때는 서러움을 헤아려주는 것도 끝이 없고, 분쟁을 조율할 방법도 없다. 이때 아이는 이성을 잃은 상태이고 막무가내이다. 그렇기에 재우는 게 맞고 그것이 옳다 하더라도 '존중'하는 관점으로 보면 잘 모르겠다. 어렵다. 고민하는 이 순간조차 합리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괴롭다.
나는 '남의 집 애'라는 말이 좋았다.
그러면 나는 '남의 집 엄마' '남의 집 아빠 '
'남의 집 이모 삼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고 좋아하고
샘내고 안심하고 걱정하면서
'남의 집 애'를 같이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고마웠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어린이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좀 시끄럽고 통제하기 힘들고 가끔 보면 귀엽다는 생각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막상 엄마가 되고 보니 참 외로웠다. 모두가 아이를 키우는 세상도 아니고,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마음도 아닌 세상에서 누군가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남의 집 누군가'가 되어주기 위해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 부모 자식 간이 가장 친밀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사이다. 나는 애정이지만 아이는 강요가 될 수 있고, 나는 배려지만 아이는 구속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 부모 자식 간의 감정이다. 고마운 '남의 이모' 덕에 추가 기울어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양육서가 아니다. 하지만 웬만한 양육서보다 더 아이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한다. 비록 지금도 아이들에게 무례하게 굴고, 내일도 제법 폭력적으로 양육을 하겠지만 아이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덕분에 미래에는 좀 더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 우아한 어른인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뜬금없지만 바라본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 : 작가는 자신만의 이유로 초면의 어린이에게는 존댓말을 쓴다고 해요. 아이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의견이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