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형사정책연구원에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법학 논문 등 법률 관련 내용을 이해하고 분석해서 통역, 번역을 하기에는 통번역 스킬만 가지고 그때그때 필요한 자료를 찾아서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의 한계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땐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에 또 도전을 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뿐더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좋은 기회에 방콕으로 일을 하러 떠나게 되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외교통상부(지금의 외교부)에서 일을 하게 되기까지 짧은 기간 안에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다양한 setting 에 놓이게 되어 그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내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외교통상부 통상법무과에서 일을 하면서 FTA 협상회의를 따라다니고 FTA 협정문 번역을 하면서 통상이라는 분야를 알게 되었고, 그동안 내가 느꼈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언어적 background와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찾은 것이다. 고민 끝에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고, 회사분들의 조언을 듣고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법학과 국제통상법 전공으로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대학원 입학 면접을 보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학부와 석사전공 모두 통번역학이었기 때문에 법학 background가 전혀 없기도 했고, 일반대학원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몰랐던 터라 면접 때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통번역대학원의 입학 면접은 면접과 동시에 통역 시험을 보기 때문에 불편한 정장보다는 실기시험을 볼 때 내가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옷을 입고 가도 무관하다. 그래서 일반대학원 면접날 내 나름대로는 예쁘게 차려입고 간 게 핑크색 트위드 재킷이었다. 커다란 금장 단추가 네 개 달린 네이비색 스커트에 가죽 스트랩 힐을 신고 갔다. 지하철역에 내려서 학교 언덕을 올라가는데 그날 면접을 보러 온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블랙 정장을 입고 올라가는 바람에 내 눈엔 마치 검은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법대 건물 일층으로 들어가 면접대기실 문을 열었더니, 온통 블랙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들은 꼭 블랙이 아니더라도 다른 색깔 정장도 충분히 입을 수 있을 텐데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들 블랙 정장을 차려입고 앉아있었고 핑크색 트위드 재킷을 입고 들어선 날 일제히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바보같이 진행요원에게 다가가서 혹시 면접 드레스코드가 있었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입학 후에 선배 오빠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야, 법대는 블랙이지~” 하며 놀렸던 기억이 난다. 온통 블랙으로 가득 찬 커다란 강의실 안에서 나 혼자 핑크색 재킷을 입고 앉아있었던걸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빨개진다. 그 정도로 나는 법학에 대한 학문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일반대학원이라는 곳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었다.
첫 학기는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너무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나는 학부 전공이 법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원 수업뿐만 아니라 지도교수 지정과목으로 학부 수업까지 들어야 했다. 회사에서 바쁘게 일을 하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반차를 쓰고 나와 학교 수업을 듣고 다시 회사로 가서 일을 하는 날도 있었고, 저녁에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에는 수업을 듣고 밤늦게 집에 가서 과제나 발표 준비를 하다 새벽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곤 했다. 잠이 부족해 몸도 피곤하고 수업내용도 따라가기 어려워 쉽지 않은 나날들이었지만 회사에서 일하면서 접했던 내용들을 학교에서 차근차근 공부할 수 있고, 또 반대로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다뤘던 내용이 실무에서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회사에서 일을 하며 바로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많아 회사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 그리고 회사에서 바로 수업에 가느라 매번 저녁을 거르는 날이 많은 날 위해서 친구들이 간단한 저녁거리를 챙겨주기도 하고,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에도 같이 책을 구매하거나 스터디를 짤 때 잊지 않고 날 챙겨주는 등 너무 잘 도와주고 따뜻하게 챙겨준 대학원 친구들이 없었다면 학기를 무사히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학부 수업을 들을 때 같은 팀이었던 동생들도 내가 팀플레이에 그다지 도움이 못되었는데도 불평 한번 하지 않고 잘 끌어준 덕분에 좋은 학점도 받을 수 있었다. 대학원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도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지도교수님을 비롯해서 고대 교수님들 한 분 한 분 내가 감동하지 않은 교수님이 없다. 그중에서도 첫 학기 국제법 개론 수업시간에 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커다란 감동으로 남아있다. 첫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는 퀴즈를 보시겠다며 시험지를 나눠주셨다.
1. 국가의 성립 요소 4가지
2. 국제사법재판소(ICJ) 규정 제38조제1항에서 말하는 국제법의 연원
3. 6대 국제 인권협약
4. 유엔의 주요 6개 기관
5. 헌법재판소의 2011년 8월 30일 결정
6. 국제 관습법의 성립요건 2가지
그리고 국제 해양법상 연안국의 관할권에 속하는 수역.
나는 한 문제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시험지를 걷어서 보시고는 교수님께서는 짧은 한숨을 쉬셨다. ILC (International Law Commission, 국제법 위원회) 위원이기도 하신 그 교수님은 곧이어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러분들은 장차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일을 할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은
국제법은 우리나라의 국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힘들걸 예상은 했지만 회사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수업시간에 맞춰서 학교에 오는 것부터 쉽지 않았고, 심지어 기말고사 시험이 있는 날도 회사에서 급한 일이 터지는 바람에 시험시간에 학교에 오지 못하는 일도 있었고, 혼자서 차분히 책을 펴놓고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아 수업내용을 따라가는 게 너무 어렵기도 해서 한 번씩 내가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열심히 공부하는 다른 학생들에게 폐가 되는 건 아닌지 이런저런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그 교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런 의구심은 싹 사라졌다. 내가 통역사가 되려고 처음 결심했을 때 했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언어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불리한 이익을 받거나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던 나의 다부진 다짐과 국제법은 우리나라의 국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내 머릿속에서 고리처럼 연결되어 내가 잘 찾아온 게 맞구나 하는 안도감을 안겨주었고, 많이 부족하더라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두 배 가까이 차이나는 연봉의 유혹을 뒤로하고 정부기관으로 온 것도, 반정부 시위로 하루에도 수십 명씩 사상자가 발생하던 방콕 발령도 마다하지 않은 것도 다 내 고집 때문이었다. 회사생활, 학교 수업, 그리고 곧 시작하게 된 강의, 그리고 종종 부탁받는 외부 회의나 방송 통역, 번역, 행사 영어 MC 등등 생각지도 못한 많은 기회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려고 내 나름대로는 아등바등 노력했지만 학교 수업도 자주 빠지는 등 입학하면서 내가 다짐했던 것에 비해 학업에 충실하지 못했던 게 지금 생각하면 제일 아쉽고 교수님들께 죄송한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석사논문 쓸 엄두도 못 내고 있으면서 수업 청강을 부탁드리면 “언제든지 와” 하시며 흔쾌히 허락해주시는 지도교수님을 비롯해서, 회사를 그만두고 학업에 열중하고 싶어 이런저런 방법을 찾다가 결국엔 일을 포기하지 못해 며칠 안에 선택을 번복했는데도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시고 응원해주셨던 교수님, 큰소리치며 책 집필을 도와드리겠다고 해놓고는 다른 일이 너무 바빠 결국엔 아무런 도움도 못되어드렸는데도 학교 행사에서 뵈면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시는 교수님, 전 학기 국가책임수업 때 발표도 못하고 과제 제출도 못했는데 그다음 학기 조약법 수업 청강을 흔쾌히 허락해주시고 매 수업시간마다 나의 발표를 귀 기울여 듣고 존중해주신 교수님 등 매번 너그러이 받아주시는 교수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법과 영어 연구소 아우디오 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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