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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혜 Mar 31. 2016

법률번역 초보 강사의 고백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통역사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정말 lucky 하게도 막연히 꿈꾸던 UN에까지 가게 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외교통상부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 다시 대학원에 간 것만 해도 짧은 시간 안에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경험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2012년 2학기부터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졸업한 중앙대 통번역대학원에서 법률번역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졸업한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았고, 다른 강사 선생님들에 비해 나이도 경력도 한참 모자란 내가 과연 3시간짜리 대학원 강의를 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되었지만,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배워나간다는 마음으로 하면 잘할 수 있을거라시던 중앙대 지도교수님의 격려에 용기를 내어 한 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에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면 무슨 자신감에서였는지 무모할 정도로 앞뒤 생각 안 하고 거절이라는 걸 할 줄 몰랐던 것 같다.


그 해 2학기부터 정말이지 살인적인 스케줄이 계속되었다. 주중에는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고, 고대에서 학부 수업이 있는 날은 반차를 쓰고 잠시 나와 수업을 듣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저녁에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은 점심시간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그날 끝내야 하는 일을 마무리지어놓고 여섯 시에 서둘러 나와 수업을 듣고, 밤늦게 집에 가서는 과제와 발표 준비를 하느라 주중엔 거의 길어야 2-3시간 정도 잠깐 눈붙이는게 전부였고, 토요일 아침 9시부터 법률번역 강의가 있었기 때문에 한 주의 중반 이후부터는 수업준비도 틈틈이 해야 했다. 한주의 피로가 쌓이고 쌓여 절정에 이른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수업 준비를 하고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검토하느라 꼬박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 전날 푹 잘 자고 나서 하룻밤 밤을 새우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고된 일이었다. 학생들은 내가 매번 새벽 3-4시에 메일을 보내는걸 보고 신기한 듯 그때 자는 건지 일어나는 건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답은 안 자는, 아니 못 자는 것이다. 매주 법률번역 수업 전날은 어김없이 단 1분도 침대에 누워보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운 뒤 강의를 하러 가서 세 시간 동안 열심히 수업을 하고 나서 주차장으로 와 차에 타면 집까지 운전 해갈 힘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애써 힘주어 뜨면서 집에 와서는 기절하듯 잠들기를 반복했다.


강의 자체도 처음이어서 하나에서 열까지 신경 쓰이지 않는 부분이 없었고, 더군다나 법률번역 수업은 다른 통역이나 번역 수업에 비해 강사가 준비해야 하는 부분이 훨씬 많았다. 다른 통역일이나 번역일은 내가 시간이 없어 준비를 제대로 못했거나 실수를 하는 등 충분히 잘하지 못하면 위험부담이 얼마나 크든 그 뒷감당은 내가 책임지면 되지만, 강의는 달랐다. 내가 처음이라 실력이나 내공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결과가 돌아가게 해서는 절대 안 되겠다는 일념으로 강의를 하는 학기 내내 잠은 고스란히 반납하며 최선을 다했다.


기본적으로 읽히고 끝나는 일반 문서를 번역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적용으로 이어지는 legally binding 한 법률문서는 기초적인 법률지식과 legal mind가 없으면 정확히 번역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일단 이론 강의부터 준비해야 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나도 서툰 석사과정 학생일 뿐이었는데 국제법 수업 때 들었던 내용을 정리하고 다시 공부해서 자료를 만들고 중앙대 학생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이해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덕분에 수업 준비를 하다가 모르는 내용을 질문하느라 고대 친구, 선배들 그리고 친분이 있는 변호사, 검사 등 법조인 분들을 새벽마다 어지간히도 귀찮게 했다. 고대에서 수업을 듣다가도 학생들에게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내용이나 케이스가 나오면 얼른 메모해놓고 집에 가서 자료를 만들어두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학생들에게 알려주면 좋을 것 같은 텍스트나 번역 오류 사례 등을 접할 때면 잊지 않고 메모해 두었다가 수업자료로 활용했다. 그만큼 강의는 내가 하고 있었던 다른 모든 일들 중에 가장 책임이 따르고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강의도 벌써 5년 차이지만 아직 조금도 익숙해지거나 편해지지 않는 일이다.


이론 강의뿐만 아니라 매 수업시간마다 학생들 수준에도 맞고 수업 취지에도 적절한 텍스트를 고르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텍스트를 고르는데만 하룻밤을 꼬박 새기도 했으니 말이다. 또 그렇게 어렵게 고른 텍스트를 과제로 내주기에 적절하도록 편집하고 길이를 조절하다 보면 자꾸만 욕심이 생겨 분량이 길어지기 일쑤였다. 이 부분도 번역을 해보면 좋을 것 같고, 저 부분도 버리기엔 아깝고... 그렇게 과제를 내주면 번역을 하는 학생들도 어려운 텍스트를 번역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지만, 나는 학생들 모두의 과제를 검토하느라 몇 배로 더 고생을 해야 했다. 과제를 내 줄땐 분량 욕심을 부리다가도 이렇게 검토하면서 고생을 할 땐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후회하기도 했지만, 다음 수업 준비를 할 땐 또 역시나 욕심을 부리고 있는 날 발견하곤 했다.


딱 한 가지의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번역사의 재량이 비교적 큰 일반 번역과는 달리, 법률번역은 맞고 틀리고가 비교적 명확하다. 또 사소한 오역 또는 표현의 변화가 있더라도 번역사의 재량으로 여기고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일반 텍스트와는 달리 법률 텍스트는 실제로 적용되었을 때 오역에 따른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커질 수도 있다. 그래서 보통 다른 수업에서는 source text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새로운 글을 쓰는 기분으로 번역하라고 보통 가르치지만 법률번역에서는 정반대이다. 원문을 바닥끝까지 파고들어 그 의도와 의미를 정확하게 옮겨야 한다. 그 결과 번역문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한국어가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 보니 나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부드럽게 돌려서 말하기보다는 직설적으로 틀린 부분을 지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수업시간에는 모든 학생들의 번역을 일일이 작은 부분 하나하나까지 다 같이 살펴볼 수가 없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틀린 부분과 특별히 주의해서 번역해야 하는 부분, 그리고 다 같이 고민해보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 위주로 다룬다. 그래서 잘된 번역과 틀린 번역을 다 함께 살펴보고 더 나은 대안을 고민해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제출하는 과제에 대한 피드백을 줄땐 다 같이 다루지 못하는 부분까지 더 꼼꼼히 검토하고 하나하나 피드백을 주려고 노력한다. 한 페이지 가득 형광펜과 여러 가지 색깔 펜으로 일일이 피드백을 적어주다 보면 손목이 뻐근하고 욱신거려 핫팩으로 찜질을 해가며 검토를 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내 나름대로는 고생해서 정성껏 피드백을 써서 주었는데 학생들 중 간혹 몇 초 만에 휙 보고는 바로 가방에 넣어 버리는 학생을 볼 때면 눈물이 날 것처럼 울컥 서운했지만, 나는 나의 책임을 다한 것으로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또 학생들이 자세히 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과제 검토를 소홀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을게 뻔했다. 첫 해에는 학기말 즈음이 되었을 때 거의 매주 손목에 파스를 붙여가며 버텼는데, 두 번째 해에는 결국 손목이 탈골 되어 새벽에 응급실에 가서 치료를 하고 딱딱한 plaster를 찬 채로 강의를 하러 가서 왼손으로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써가며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손목 통증은 달고 산다. 그래서 내 차 안에는 붙이는 파스에서부터 스프레이, 압박붕대, 테이핑, 손목 보호대 등등이 구비되어 있다. 종종 내 차에 탄 사람들이 그걸 보고는 국가대표 운동선수냐며 놀리기도 한다.


이론 강의를 하고, 번역 과제를 내주고 다 함께 살펴보고, 중요한 표현들을 외울 수 있도록 퀴즈도 보고, 또 기본적인 법학 개념을 익힐 수 있도록 매주 다른 주제로 미니 리포트도 내주는 등 내 나름대로는 수업시간 세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수업을 진행한다. 또 법학 전공자들이 아닌 학생들이 딱딱하고 어려운 법률번역에 조금이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재미있는 동영상을 활용하는 것이다. 드라마나 쇼프로에 계약서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거나, 법정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하는 대사가 수업내용과 합치하는 걸 발견하면 기쁜 마음에 얼른 다운로드해서 수업자료로 만들어 둔다.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딱딱한 법률번역 수업시간 3시간 중에 짧지만 동영상을 보는 몇 분 동안은 조금이나마 숨통이 틔었을 것이다. 이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학기 강의평가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피드백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대학원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부할 때와 그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에 진출해서 professional 한 통번역사로 일을 할 때 내게 요구되는 결과물의 수준은 천지차였다. 또, 학교에서는 실수하고 틀리는 것이 배워나가는 과정의 일부로 용납이 되지만 사회에 나오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학생들이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칭찬을 많이 해주고 조금은 쉬운 텍스트로 다독여가며 수업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교수님들도 계시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통번역대학원 재학생들의 목표가 졸업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물론 일단은 졸업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눈앞에 놓인 현실적인 목표인 건 분명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나왔을 때 교수님들이 수업에 맞게 편집한 텍스트가 아니라, 실무에서 실제로 쓰이는 텍스트 그대로를 그 분야의 전문가 못지않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정확하게 번역해낼 수 있도록 최대한 학교와 실무의 gap을 줄여주고 싶다. 딱 한 가지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닌 일반 번역 수업시간에는 학생들 저마다의 의견이 다를 수 있으니 활발하게 토론도 하며 화기애애한 수업이 진행될 수 있겠지만, 내 수업시간에는 아쉽게도 본인의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하는 학생은 정말이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제히 수동적으로 내 말을 듣고 받아들이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질문을 할 뿐이다. 어려운 부분을 놓고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 하나같이 주눅 들어 대답을 못하고 있는 걸 볼 때면 내가 너무 학생들의 기를 죽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진다. 마치 내가 고려대에서 국제법 수업 시간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주눅 들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많은 책임감을 느낀다. 학생들의 서로 다른 의견을 듣고 함께 대안을 생각하기보다는 오롯이 내가 전달해주어야 할 부분이 강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내 수업은 딱딱하고 어렵다는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그게 꼭 싫지만은 않다. 그만큼 학생들에게 더 도움이 되고 내가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힘들게 겪었던 시행착오를 내 학생들은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통번역대학원 재학 시절을 떠올려보면 난 통역에 비해 번역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과제를 꾸역꾸역 해서 내는 게 고작이었고, 매번 딱히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더라도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나거나 내가 부족한 부분을 열심히 공부해서 채워보려는 노력을 할 의욕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번역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건 “법률번역”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면서였다. 그 뒤로 내 사고 안에서 번역이란 일반 번역과 법률번역 둘로 나뉘었고, 한국어로 또는 영어로 또 하나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일반 번역과는 달리,  원문의 정확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도착어인 한국어의 매끄러움을 포기하고, 또 읽히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적용되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법률번역이라는 분야가 내게는 완전히 새롭고 흥미진진한 세계였다.



내가 일반대학원 법학과에 입학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 초등학교 교사이신 우리 엄마는 이런 얘기를 해주셨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매일 숙제로 썼던 일기가 너무 재미가 없고 지극히 있었던 사실만을 무미건조하게 기술해 놓은 “기록”에 지나지 않아, 창의력이나 감성이 지나치게 부족한 아이로 자랄까 봐 엄마로선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지금 내 기억에도 어릴 때 동화책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동화책은 간략한 줄거리만 외워서 읽은 척했고, 허구적인 동화책보다는 사실적인 위인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김정호 위인전을 읽다가 김정호가 역적으로 몰려 수년간 고생해서 만든 지도를 연산군이 마당에서 모조리 태워 없애던 장면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꾸며쓴 소설보다는 유명인들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쓴 에세이나 자기계발서를 즐겨본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아무리 화려한 미사여구를 잔뜩 써서 예술적이고 말랑말랑하게 써놓은 텍스트일지라도 내가 번역하면 있는 사실만을 전달하는 딱딱한 설명문이 되고 만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의 능력 밖이다. 통번역대학원 재학 시절 문화예술 번역 시간에 애니메이션 영화 대사를 번역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주인공이 탄식하며 내뱉은 한마디 “Oh, boy...”를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오, 소년이여.”라고 번역했다가 동기들에게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었던 적도 있다. 그만큼 나는 문학적인 창의성은 빵점인 것 같다. 딱딱하고 사실적인 법률번역이 내게는 체질적으로 잘 맞다는 말을 하고 싶어 서론이 길었다. 엄마는 문학적 감성이 부족해질까 봐 걱정하시지만, 이렇게 창의성이 요구되는 번역은 예전부터 쭉 그래 왔듯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큰 인기를 얻으며 종영되고 나서 관련 행사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류팬들을 위한 탤런트 김수현과 박해진 씨의 팬미팅 행사에서 영어 통역을 맡게 되었는데, 그 행사의 규모는 엄청났다. 내가 지금까지 통역을 하거나 영어 MC를 봤던 무대 중에서 규모로 따지면 최고였다.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 꽉 찬 팬들의 함성에 무대가 흔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대부분 일본, 중국 팬들이었기 때문에 일본어 통역사가 일본어로 메인 MC를 봤고 그다음 중국어, 영어 순으로 서브 MC를 맡았다. 현장의 뜨거운 열기와 팬들의 함성소리로 나도 더불어 신이 나서 행사를 함께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 박해진 씨의 순서가 돌아왔을 때 카퍼레이드와 선물 증정 이벤트를 끝내고 무대로 올라오신 박해진 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중에 팬서비스 차원에서 드라마에 나왔던 대사를 직접 무대에서 재연하는 순서가 있었다. 무대 뒤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천송이(전지현)에게 이휘경(박해진)이 고백하는 장면이 나왔고 팬들의 함성소리가 정말이지 하늘까지 찌를 기세였다. 박해진 씨는 천천히 감정을 몰입하시더니 “너와 네 가족 내가 죽는 날까지 책임질게. 넌 너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아.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하고 대사를 읊으셨다. 곧바로 일본어와 중국어로 통역이 이루어졌고, 그다음은 내가 영어로 통역을 할 차례였다. 그런데 “책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바로 그 전날 회사에서 같은 부서 변호사님과 고민했던 한 조항의 제목이 스쳐 지나갔다.

“Responsibility and Liability”


였는데 사실 이 둘은 그 성격과 법적 효과는 다르지만 한국어로는 모두 “책임”으로 번역이 가능한 단어였기 때문에 이 둘을 어떻게 서로 다른 두 단어로 번역을 하면 좋을지를 고민했던 것이다. 박해진 씨가 “책임..”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책임? responsibility? liability? 무슨 책임? 법적 책임?...” 하고 고민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고민한 시간은 순간적이었고 1초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통역실수는 하지 않았지만, 끝나고 나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도 참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영어로 통역을 할 때 굳이 “책임”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그 느낌을 훨씬 더 잘 살려서 통역할 수도 있다. 그만큼 나는 법률번역에 푹 빠져있었다.


대학원과제, 발표 준비, 시험공부, 회사일, 강의 그리고 그 외에도 외부에서 부탁받는 여러 번역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주말에도 마냥 푹 잘 수도 없었다. 주말에도 푹 쉬지 못하고 다시 월요일이 되어 출근을 하고 또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 한주가 반복되었다. 거기다 한 번씩 외부 통역일이 들어올 때면 그 회의 통역을 위한 공부도 하고 또 잠시 녹슬었을지도 모르는 통역 스킬을 벼락치기해서 다시 연습해야 했다. 방송 통역이 있는 날은 새벽부터 메이크업을 받고 촬영장에 가서 스탠바이를 하고, 녹화를 하고 나면 새벽에서야 끝나는 일이 보통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와 두꺼운 메이크업을 겨우 지우고 한두 시간 잠깐 눈 붙인 후에 다시 출근을 했다. 강의가 있는 학기말 즈음이 되면 어김없이 과로로 병원신세를 지고 링거를 맞는 일은 익숙해질 정도였다. 녹즙, 종합비타민, 홍삼 등등 온갖 영양제를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챙겨 먹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특히 홍삼은 통역대학원 입시 준비를 할 때부터 즐겨(?) 먹기 시작해서 이제는 홍삼을 안 먹으면 기운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중독되기에 이르렀다. 마시는 홍삼팩은 기본이고 떠먹는 홍삼 진액에서부터 절여서 말린 절편을 포함해 온갖 제형의 홍삼이란 홍삼은 안 먹어본 것이 없을 정도다. 덕분에 작은 이모는 명절에 홍삼 선물이 들어오기만 하면 고스란히 내게 다 보내주시면서 “시집도 안 간 처녀애가 그렇게 약을 좋아해서 어떡하니.”하며 걱정하신다. 그 정도로 홍삼을 먹지 않고서는 피곤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주변에서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다 하느냐고 놀라움 반 걱정반 섞인 말들을 할 때마다 “홍삼이 나의 에너지”라며 농담으로 받아 치곤 한다.






[법과 영어 연구소 아우디오 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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