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가기 어려운 법률통번역의 매력
6년차 통역사인 내게 많이들 물어보는 것이 하나 있다.
"다른 많은 분야들 중에서 왜 하필 그 어려운 법률분야를 택하셨어요?"
매번 대답하지만 나는 내가 법률분야를 "고른" 적이 없다. 통역대학원을 졸업한 후 들어간 첫 직장이었던 형사정책연구원, 그리고 유엔마약범죄국(UNODC)을 거쳐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시절 부터 시작해 산업통상자원부로, 다시 외교부 국제법률국에서 일을 하게 되고, 국제법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을 다시 들어가고, 법률번역 강의를 맡게되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지금도 물론 다양한 분야의 통역을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법률분야의 일을 가장 많이 하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릴 겨를도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뒤돌아볼 틈도 없이 너무나 숨가쁘게 흘러왔다. 법률관련 회의통역 준비를 하거나, 법률문서 번역을 의뢰받아 작업을 하면서 매번 너무 어려워서 끙끙댈때마다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잘 하고 있는게 맞는걸까 하는 생각뿐이다.
분야를 불문하고 쉬운 통역은 없다. 동료 통역사들은 너무나 공감할 것이다. 어떤 회의의 통역을 맡게되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 못지않게 그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정확한 용어로 통역을 해야하기 때문에, 통역을 의뢰받은 순간부터 회의가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 통역사들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또 공부한다. 그런데 왜 유독 법률분야는 진입장벽이 높다고 여겨지고, 다들 어렵다고 생각하는 걸까? 법률용어가 어렵기때문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기에는 의학, IT, 금융, 보험 등등 기술적인 용어가 어렵기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런 고민을 하고있을 즈음 만나게된 한 변호사님께서 명쾌한 답을 주셨다. 다른 분야는 영어든 한국어든 언어가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비록 통역과정에서 틀린 용어를 사용하거나 하는 등 통역 실수가 있더라도 결과적으로 내용전달에 크게 지장이 있지 않으면 "의미전달"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만, 법률분야는 언어자체를 굉장히 민감하게 사용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다른 언어로의 전환이 특히 어렵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용어들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배상과 보상", "계약 해지와 해제", "합의와 협의" 처럼 겉으로는 비슷해보이는 단어들이 법률맥락에서는 완전히 다른 법률효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각각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실제로 내가 외교부 국제법률국에서 일할 때, 다른과 소속 변호사님으로부터 문의를 받은 적이 있다. 독일과 이스라엘 간 1952년에 체결된 룩셈부르크 협약을 번역하다 바로 "배상"과 "보상"이 문제되었던 사례이다. 해당 조항은 다음과 같다.
And WHEREAS the State of Israel has assumed the heavy burden of resetting so great a number of uprooted and destitute Jewish refugees from Germany and from territories formerly under German rule and has on this basis advanced a claim againt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for global recompense for the cost of the integration of these refugees.
여기서 recompense 의 한국어 번역이 이슈였다. 간단하게만 설명하자면, 우리나라 법에 따르면 위법행위에 대한 것은 배상, 그리고 적법행위에 대한 것은 보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보상을 한다고 얘기하면 해당 행위가 적법행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구분은 우리나라 법에 근거한 구분이고, 다른 법체계에서는 동일한 논리로 구분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은 대부분 영미법을 따르고 있고, 영어에서는 배상과 보상을 이렇게 둘로 나누고 있지 않아 indemnification, compensation, restitution, reparation 등 다양한 표현을 case by case 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 조문에서 문제가 된 recompense를 "배상"이라고 번역할 경우, 당시 독일정부의 행위가 "위법"했다는 뜻을 내포하게 되고 반대로 "보상"이라고 번역할 경우 독일정부의 행위를 "적법"한 것으로 보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 역사적 배경을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법률맥락에서 해석을 해야하는 굉장히 까다로운 번역인 것이다. "배상"과 "보상"은 한글자 차이지만 뉴스나 신문기사 등 언론에서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외교맥락에서도 이렇게 용어를 잘못 사용한 경우 실제로 민감한 외교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이처럼 읽혀지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일반문서와는 달리 법률문서는 실제 적용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가장 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즉, legally binding 한 문서에 오류가 있을 경우, 그 문서가 실제 상황에 적용되었을때 누군가가 피해를 입게되는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내가 외교통상부에 특채로 입사하게 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FTA, 즉 자유무역협정의 협정문은 통상조약으로서 국가와 국가가 체결하는 대표적인 법률문서이다. 한미 FTA, 한-EU FTA 협정문의 한국어 번역본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외교부 역사상 가장 큰 위기상황이 발생했던 것도 그 문서가 일반문서가 아닌 법률문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역오류로 지적된 부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반문서에서 똑같은 실수가 있었다면 전혀 문제되지 않을 성격의 오류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법률문서라는 것은 그 문서에 찍히는 모든 글자 하나하나, 심지어 문장부호 하나까지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특히 FTA는 일부 기업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하나 있다. 밀리언달러 콤마 케이스(Million Dollar Comma Case)라고 불리는 사례이다. 캐나다의 케이블티비 회사인 Rogers Communications와 전신주를 제공하는 회사인 Bell Alliant 간에 체결한 계약서에 다음과 같은 조항이 들어있었다.
This agreement shall be effective from the date it ismade and shall continue in force for a period of five (5) years from the dateit is made, and thereafter for successive five (5)year terms, unless and until terminated by one year prior notice in writing by either party.
이 조항에서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세번째줄에 있는 콤마 하나였다. 이 콤마 하나를 두고 두 회사간의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Rogers는 콤마 뒤에 나오는 부분 즉, 한쪽 당사자가 1년 전에 서면통보를 하면 해당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 바로 앞에 나오는 "and thereafter for successibe five (5) year terms" 만 수식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최초 계약기간인 5년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Bell Alliant 는 해당 콤마 뒤에 나오는 부분이 그 앞에 나오는 부분 전체를 수식하기 때문에 최초 계약기간 5년이 만료되기 전이라도 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1심에서는 Bell Alliant 가 승소했지만, 항소심에서 이 계약의 불어본에 근거한 해석을 주장해 Rogers가 승소했다. 복잡하게 얽힌 계약관계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Rogers가 벌금을 내게 되었는데, 어쨌든
계약서에 찍힌 콤마(,) 하나때문에 한 기업이 백만달러에 달하는 금전적 손해를 보게된 것이다.
우리나라 대법원 케이스 중에도 재미있는 사례가 하나 있다. 과수원케이스(대법원 1994.12.20 자 94모32)라고 하면 법대생들은 다들 알 것이다. 문제가 된 조문은 형법 제170조제2항 "과실로인하여 자기의 소유에 속하는 제166조 또는 제167조에 기재한 물건을 소훼하여 공공의 위험을 발생하게 한 자도 전항의형과 같다."이다. 얼핏 보면 문제가 없는 문장처럼 보이지만 legal mind를 가지고 다시 들여다보면 "자기의 소유에 속하는" 이 부분이 제166조에 기재한 물건만 수식하는지, 아니면 제166조 또는 제167조에 기재한 물건을 모두 수식하는지 여부를 두고 해석이 갈릴 수 있다. 즉,
① 자기의 소유에 속하는 제166조에 기재한 물건 또는 (자기나 타인의 소유에 속하는) 제167조에 기재한 물건
② 자기의 소유에 속하는 제166조에 기재한 물건 또는 자기의 소유에 속하는 제167조에 기재한 물건
* 제166조는 일반건조물의 경우를, 제167조는 일반물건의 경우를 규정한다.
이렇게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 사건의 피고는 타인의 소유에 속하는 과수원에서 담배를 피고나서 제대로 끄지 않아 사과나무 217주 등 시가 671만원 상당을 소훼했다고 주장되었는데, 사과나무는 건조물이 아니니 일반물건(제167조)에 해당하고 이 사과나무 실화 사건에서 피고인이 담배를 피운 과수원은 타인 소유였다. 따라서 위의 1번에 따라 해석할 경우 피고인은 해당 처벌조항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되지만, 2번에 따라 해석할 경우에는 처벌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 없는 상황이 된다. 대법원의 다수의견은 형법 제170조 제2항에서 말하는 ‘자기의 소유에 속하는 제166조 또는 제167조에 기재한 물건’이라 함은 ‘자기의 소유에 속하는 제166조에 기재한 물건 또는 자기의 소유에 속하든, 타인의 소유에 속하든 불문하고 제167조에 기재한 물건’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제1심의 공소기각결정과 그에 대한 원심의 항고기각결정을 모두 취소하고 사건을 제1심법원에 돌려보낸 사건이다. 이렇게 한 사람의 유무죄가 조문해석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는데, 이 부분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인식없이 어느 한쪽으로 번역할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어-영어를 언어조합으로 가지고 있는 나를 비롯한 다른 통역사들이 특히 법률분야의 통역과 번역 일을 하는 것이 까다로운 또다른 이유는 우리나라 법은 대륙법 체계(civil law)를, 그리고 미국을 포함해 영어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보통법 체계(common law)를 따르고 있어, 그 법체계부터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나라 법체계에 따라 한국어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법률용어들을 미국법체계에 따라 영어로 practice를 하는 법조인들은 다른 기준에 따라 구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즉, 같은 용어라고 하더라도 법체계에 따라 그 정의와 적용범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어에서 영어로, 또는 영어에서 한국어로 통역을 할 때 같은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한국 법조인들과 미국 법조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 법체계에는 존재하는 개념이 미국법체계에는 아예 없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 예로, 미국법 개념에는 없는 "당사자주의"를 영어로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를 두고 변호사님들과 한참을 논의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 법 조문들이 대부분 독일,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일본을 거쳐 들어온 개념들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어-독일어 간의 이동은 비교적 훨씬 수월하다. 그래서 한국어-독일어 통역사들이 부러울때가 많다.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한때 크게 이슈가 되었던 "이태원 살인사건"의 피고인 아더 패터슨이 2015년 한국으로 송환되어 다시 공판이 진행되면서 언론의 관심대상이 되었다.
나는 학생들에게도 직접 가서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도 지켜보고, 법정통역도 들어보라고 권했고, 나도 직접 가보았다. 그날은 공판기일이어서 정식 재판은 아니었지만 예상대로 방청석은 기자분들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나의 관심대상은 아더 패터슨도 피고측 변호사도, 그리고 검찰측 검사도 아닌 블랙정장을 입고 법정 가운데 앉아서 통역을 하시던 통역사였다. high profile한 케이스인 만큼 부담이 적지 않았을텐데 차분히 통역을 해나가시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판사분께서 재판진행을 중단하시고는 통역사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흔히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고 말하는 "double jeopardy"의 통역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 재판에서 일사부재리의 원칙의 적용여부가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쟁점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문제가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독일법을 계수한 우리나라 법 상의 일사부재리의 원칙과 영미법에서 말하는 double jeopardy 원칙은 엄격하게 말하면 그 적용범위가 다르다. 그래서 영미법의 double jeopardy 원칙을 "이중형 금지의 원칙" 또는 "이중위험 금지의 원칙" 등으로 구분해서 말한다. 그런데 20년 가까이 법정통역을 하셨다는 최고 베테랑 법정통역사이신데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간과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검찰측에서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고 말할때도 "double jeopardy"라고 통역을 하고, 피고가 "double jeopardy"라고 얘기할 때도 한국어로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고 통역을 하는 바람에 피고측과 검찰측 간에 이해의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그래서 판사분께서 이에 대해서 알기쉽게 통역사에게 설명을 해주시고 나서야 재판이 재개되었다. 통역때문에 재판이 중단된 사례로, 법정 통역도 많이 하고 있는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있는 사례였다.
이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우리나라 형법에 따르면 "살인"의 개념은 하나밖에 없지만 미국법에서는 고의성 등의 여부에 따라, first/second degree murder(일급살인, 이급살인), homicide, manslaugter 등으로 구분해서 사용한다. 미국 순회법원에서 패터슨 측 변호인이 변론을 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찾아본 적이 있다. 그 때 그 변호인은 우리나라 형법에 규정된 살인을 언급하며 "homicide"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판사 세 분 중 한 분이 그 정확한 정의에 대해 다시 묻는 장면이 나온다. 즉 homicide 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미국법에서는 공소시효가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나라 법에 따른 정의는 어떠한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케이스에서 아더 패터슨의 한국송환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나라와 미국 간에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되어 있기 때문인데, 만일 송환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오고갔을 수많은 문서에서 미국법 상의 "homicide"와 대한민국법 상의 "살인"이 잘못 사용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아찔한 상상도 해보았다.
법과 영어의 콜라보
는 이처럼 정말이지 쉽지 않은 콜라보이다. 그래서 번역을 하거나 회의통역 준비를 할때 눈물 쏙 빠지도록 어려워서 밤을 새며 끙끙대는 날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처음에도 말했듯이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라 나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온 길이다. "법률은 너무 어렵고 힘드니 다른 걸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든적은 신기하게 한 번도 없다. 주변 변호사 분들께서는 종종 "그렇게 공부 많이 하면서 차라리 로스쿨을 가지 그러세요" 하며 농담을 하시기도 한다. 설령 내가 로스쿨을 가게 되더라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lawyer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법률 통번역을 조금 더 잘 하기 위함일 것이다. 아직 모르는 것도 너무 많고, 부족한 점도 많아 한걸음 한걸음 결코 쉽게 내딛어지지 않는 길이지만, 너무나 감사하게도 내 주변에 먼저 손내밀어 도와주시는 분들, 나를 믿고 지켜봐주시는 분들, 내가 도움을 요청할때마다 기꺼이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분들이 많아 큰 힘이 된다. 내게 자연스럽게 다가온 이 길을 따라 느리지만 멈추거나 되돌아가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법과 영어 연구소 아우디오 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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