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의 시선에서 바라본 법정이라는 세계
"주문, 피고인의 무죄를 선고한다."
방청석에 앉아있던 가족들은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고, 타닥타닥 기자들의 타이핑 소리가 거세졌다. 내 사건은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피고인석에서 혼자 (선고기일에는 보통 변호인이 참석하지 않는다) 여전히 불안에 떨며 나만 바라보고 있는 피고인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차, 피고인은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얼른 마이크에 대고 방금 선고된 주문을 영어로 통역했다. 내 입에서 "not guilty"라는 단어가 나가자마자 피고인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거의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했고, 판사님이 아닌 나에게 여러 번이나 허리를 숙여 영어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얼마나 불안하고 긴장되었을까. 일초라도 더 빨리 재판 결과를 통역해주지 못했던 게 미안해졌다.
프리랜서 국제회의 통역사로서 내가 하고 있는 일 중 하나는 법원에서 재판 통역을 하는 것이다. 형사재판은 피고인이나 증인이 외국인일 경우, 그리고 민사재판은 보통 증인이 외국인일 경우 통역을 하게 된다. 항소심의 경우에는 구속 중인 피고인 접견을 하기 위해서 변호인과 함께 구치소에 동행하기도 한다.
법정 통역을 시작한 건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 서울 중앙 지방법원에서 통역인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호기심에 지원하면서부터였다. 처음에는 비교적 금방 끝나는 난민행정심판 통역을 가끔씩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인하우스 통역사로 일하던 외교부를 그만두고 프리랜서 통역사가 된 시점부터 신기하게도 형사, 민사재판 의뢰가 더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지금은 1심뿐만 아니라 항소심 재판 의뢰도 많이 들어온다. 그리고 내가 소속되어 있는 서울 중앙 지방법원뿐만 아니라 다른 법원에서까지 의뢰가 오는 경우도 있어 놀랄 때도 있다.
통역사로 일하면서 가장 뿌듯한 때는 누군가 내게 의지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다. 큰 규모의 국제회의에서 리시버를 끼고 내가 하는 통역을 들으면서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청중을 발견할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그리고 무겁게 느끼는 곳이 내게는 바로 법정이다. 지난해 가장 자주 갔던 법정은 서울 중앙지법 307호 법정인데, 담당 판사님이 굉장히 친절하고 유쾌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판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재판을 받으러 오는 피고인들에게는 이 재판이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단 한 번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통역사인 내가 하는 일은 재판 결과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절대 그래서도 안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내가 맡은 사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채 통역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피고인들은 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인지 가끔은 내가 버거울 정도로 나에게 의지를 하기도 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너무나 불량한 죄질의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들은 통역을 해주기 싫을 때도 있고, 또 반대로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피고인들의 진술을 통역할 때는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써야 하기도 한다.
나는 법정에서 참으로 다양한 인생의 면모를 목격한다. 판사, 검사, 변호인, 피고(인), 원고, 교도관, 경위, 증인, 방청객 등이 등장하는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펼쳐지고, 재판 당사자도, 법조인도 아닌 그야말로 제삼자인 나는 한걸음 떨어져 객석에서 이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법정은 특별히 비공개로 진행되는 재판이 아닌 한 누구나 와서 방청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지만, 본인이 소송에 휘말리기 전에는 오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어서인지 일반 대중들에게는 참 낯선 곳처럼 느껴지나 보다. 범죄를 저지른 나쁜 사람의 말을 통역하는 일에서 가치 있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만일 너무나 무시무시한 특수상해 혐의를 받고 있는 피고인이 많이 다쳐 응급실에 실려간다면 담당 의사가 느끼는 감정에 비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글인데 이상하게 그 어떤 화려한 명언보다 이 글귀가 아직까지도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 일반적인 통역을 할 땐 화자의 메시지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또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과연 내가 통역사로서 피고인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지, 또는 이해하려고 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
긴장감 가득한 법정이라는 곳에서 나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너무나도 다양한 인생을 경험하고 듣는다. 그리고 내 입을 통해 그들의 말을 전달한다.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릴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는 오직 통역사의 말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고, 또 통역사 외에는 심지어 나를 변호하는 변호인마저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과연 어떤 심경일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진다. 여전히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하는 말은 알아듣기 어렵고, "편면적 방조"를 "평면적 방조"로, 또는 "주위적 공소사실"을 "주의적 공소사실"로 잘못 알아들어 헤매기도 한다. 또 주변 지인들은 쉽게 "돈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하곤한다. 물론 “돈 안되는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역인 소환장이 오면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또 법원으로 향하게 되는 걸 보면 적어도 내게는 무언가 가치 있는 의미가 있어서일 텐데, 이곳에서 내가 경험한 공개되지 않은 장면들을 하나씩 하나씩 써나가면서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 한다.
제가 문을 열어드릴테니
법정으로 들어와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