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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by 노다해

“무례한 줄은 알지만, 결혼은 언제 해요?” 결혼 생각이 없던 시절, 대화 한 번 나눠보지 않은 사람에게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상대는 대략 60대의 여성으로, 자녀가 대략 내 또래 아니 나보다 좀 더 나이가 있는 눈치였다. 합창단에서 함께 노래하며 인사만 나눈 사이였다. 어쩌다 단둘이 낯선 길을 동행하게 되었는데, 대화의 공백이 어색했던지 불쑥 그렇게 물어왔던 것이다.


처음 대화를 나눌 때 꺼낼만한 무난한 주제는 얼마든지 있다. 합창단 생활에 대해서, 점심 메뉴에 대해서, 하다못해 날씨 이야기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무례함을 무릅쓰고서라도 30대 미혼 여성에게 꼭 물어야 하는 질문이었나보다. “그건 저도 모르죠”라며 웃어넘겼지만, 조금은 어이없고 지긋지긋한 마음까지 들었다.


친척들에게도 들은 적 없는 외모나 결혼, 출산에 관한 잔소리를 합창단에 입단한 첫 1년 동안 이미 잔뜩 들은 터였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해 왔다. 집 밖에 나가 일해 본 적이 없고 가정에만 헌신해 온 그들에게는 중요한 일이 저것뿐이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이해해 보려 했지만,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니 이제 좀 그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가까운 동생이 “누나 결혼 언제 해요?”라고 묻는 건 전혀 다르다. 결혼식장을 예약할 때부터 결혼 소식을 알린 친구였다. 내 결혼식에 꼭 참석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청첩장이 나오기도 전부터 미리 일정을 빼두라고 일러둔 참이었다. 그러니 달력에 표시해 두는 것을 잊었다가 갑자기 떠올라서 묻는 말인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관계의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 하는지에 따라 내가 느끼는 감정의 결은 무척 다르다.


자석의 방향에도 맥락이 있다.


자연에는 맥락에 따른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지만, 물질의 특성이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자석에는 N극과 S극이라는 방향이 있고, N극은 빨간색, S극은 파란색으로 표시한다. 이렇게 색을 칠해 놓다니, 자석의 방향은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 자석의 방향은 외부 자기장에 따라 바뀔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자석의 기존 상태와 외부 자기장의 맥락에 따라 자석의 방향과 세기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자석.png 사진 1. 자석은 N과 S극이 있다. 자석에는 금속이 붙는 성질이 있다. (출처: Unsplash)


이러한 현상을 자석의 이력(履歷)현상이라 부른다. 일자리에 지원할 때 제출하는 이력(履歷)서와 같은 한자이다. 이력서는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과정을 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석이 겪어온 외부 자기장의 흐름과 그에 따라 자석이 지니게 된 자기적 특성의 변화를 이력현상이라 부른다.


이력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자석의 기본 단위가 주변 상황을 살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석을 두 동강 내면 자석 조각은 또다시 N극과 S극으로 나뉜다. 계속해서 자석을 쪼개다 보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자석의 최소 단위가 드러난다. 물질의 최소 단위를 원자라고 부르듯이, 자성의 양방향 극성을 지닌 자석의 최소 단위라는 의미로 이를 자기쌍극자라고 부른다.


자석은 대부분의 자기쌍극자가 같은 방향으로 정렬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짜장면이 짬뽕보다 더 인기가 많은 셈이다. 두 명이 중국집에 갔을 때 짬뽕과 짜장면 하나씩 시키는 것보다는 한 가지 메뉴를 2인분으로 시켰을 때 더 빨리 나오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메뉴를 통일시키듯이, 자기쌍극자들도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다.



자기쌍극자.png 그림 1. 자석은 반으로 쪼개면 또 다시 극성이 나뉜다. 이러한 자석의 최소 단위는 자기쌍극자라 부른다.


어느 날 중국집 사장님은 ‘우리 집은 짬뽕도 정말 잘하는데 사람들이 몰라줘 아쉽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짬뽕을 소개하기 위해 짬뽕을 파격적으로 100원에 판매하기로 했다. 그러면 음식이 빨리 나오는 것보다, 짬뽕의 할인된 가격이 더 큰 메리트로 다가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조금씩 짬뽕으로 갈아타기 시작하고, 어느새 대부분의 사람은 짬뽕을 더 선호하게 된다. 이런 경향은 중국집 사장님이 짬뽕 가격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유지될 테다. 이미 대세는 짬뽕으로 기울었으니 말이다.


짬뽕을 파격적으로 할인하기 전과 짬뽕과 짜장면의 가격이 동일하다고 해도, 이제 사람들은 짬뽕을 더 많이 먹는다. 자석의 이력현상도 이와 비슷한 원리로 작동한다. 특정 메뉴에 대한 선호는 자기쌍극자의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고, 파격적인 가격 할인은 외부 자기장 즉, 외부 환경의 변화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자석의 방향과 반대로 아주 강한 외부 자기장을 걸었다가 풀어주면, 더 이상 외부 자기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석의 방향은 뒤바뀌어 있다.


좋은 맥락 만들기


외부자기장의 이력에 따라 자석의 방향이 달라지듯이, 사람은 같은 온도도 계절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봄은 포근하게 느껴진다. 겨우내 낮은 온도에서 지내느라 몸이 추운 데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5월의 하루 평균 기온은 대략 20℃이다. 이때 느끼는 날씨는 따뜻함을 넘어 조금은 덥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다르다. 9월의 하루 평균 기온은 대략 24℃이다. 5월보다 기온은 높지만, 9월은 시원하게 느껴지고, 조금만 온도가 내려가도 서늘하다고 느낀다. 기온은 똑같지만, 이전에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니깐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은 어쩌면 좋은 맥락을 만들어두려는 선조들의 지혜인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기분이 상하더라도, 좋은 맥락이 꼭 내게 좋은 일로 돌아오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어도 최소한 손해 보는 일은 아닐 테다. 지금 떡 하나 더 줌으로써, 나중에 정말 기분이 상하고 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쩌면 조금은 완충 작용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라는 지금 당장의 내 감정이 아닌 아직 닥쳐오지 않은 미래까지 고려한, 선조들의 깊은 뜻을 담은 속담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 물리의 시선

일상에 녹아든 물리를 소개합니다.


* 글쓴이 - 노다해

물리학을 전공하고, 세상을 탐험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dahae.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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