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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해 May 28. 2024

재회

이제 막 더워지기 시작한 어느 날 이었다. 어떤 2학년 선배가 봉사활동에 같이 가자고 했다. 장난기가 많고 마음씨가 좋은 선배였다. 그렇게 잘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나를 잘 챙겨주었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토요일 오후 학교 정문으로 나갔다. 초록색으로 물든 이파리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땅에서는 약간의 습기가 올라왔다. 예상치 못한,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마주칠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던 바로 그 재수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려 고등학생이었다. 철없는 중학교 시절의 어리석은 짓 정도야 너그러이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아이도 나도 치열한 과학고등학교 입시를 치른 끝에 결국 집에서 가까운 일반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씁쓸한 상황을 뒤로 하고, 대학이라는 새로운 경주를 시작한 상태였다. 비슷한 처지에 반가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우리는 지난날의 과오는 뒤로하고 성숙한 고등학생답게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그날 봉사활동에 가는 인원은 단출했다. 나와 그 아이, 2학년 선배와 봉사활동 지도 선생님까지 총 네 명이었다. 그 아이와 그 선배는 선생님을 따라 중학생 때부터 봉사활동을 같이 다녔다고 했다. 어째서 그 선배가 나에게 봉사활동을 제안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 선배가 나와 그 아이를 이어준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다녔고, 봉사활동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봉사활동에서 돌아왔는데, 그 아이가 문자를 보내왔다. 가끔 연락하겠다고 했다. 학교에 있을 때는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었으니 주로 밤이나 주말에 문자를 했다. 하루는 내가 전화를 해도 되는지 물었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다. 한참을 내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 아이는 그냥 묵묵히 들어줬다. 그게 참 위로가 되었다. 나는 때때로 그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부가 힘들거나, 엄마에게 서운하거나, 그냥 심심할 때도 전화를 걸었다. 불안하거나 속상하거나 답답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소리 내 말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후련했다. 대화는 대부분 나의 이야기로 채워졌고, 마음이 안 좋으면 전화기를 붙잡고 울기도 했다. 내 이야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너는 하고 싶은 이야기 없냐고 물으면, 그 아이는 괜찮다고 했다.


하루는 그 아이가 만나자고 했다. 토요일 저녁 자습이 끝나고 같이 동네를 거닐었다. 우리는 이상한 데에서 웃었다. 겨울철 얼음이 얼어있는 길에서 미끄러지며 마찰력이 없다며 웃었다. 이과 감성이 통하는 아이였다. 문과 친구들은 달은 보고 시조를 읊었는데, 그 친구와는 달 뿐만 아니라 하늘에 떠 있는 금성의 모양이 어떻게 바뀌는지 이야기했다. 하루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아이가 먼저 학교에서 화나고 속상했던 일을 이야기 해주었다. 나도 이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어서 내심 기뻤다.


수능이 끝나고 졸업식을 앞둔 추운 겨울날 그 아이는 나에게 고백했다. 당당한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라며 자신감을 내비치는 모습이 어딘가 오만해 보였지만, 애써 발휘한 용기가 가상했다. 긴장되는 상황에도 자기가 원하는 바를 진솔하게 말하다니, 대담했다. 이 아이를 이성으로서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만나면 재미있고 편했다. 무엇보다도 고백을 거절하면 이 아이와는 친구로도 지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귀자고 했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 아이를 좋아하기는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시에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아이를 만나기 전에는 기대되고 설레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감정이 그 아이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쳇바퀴 돌듯 답답한 생활에서 작은 일탈에 기분이 좋은 거라 여겼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데 미숙했던 탓에 그 아이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여러 어려움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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