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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해 May 29. 2024

첫 연애

어릴 적부터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새해가 되어 반이 바뀔 때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친구를 잘 사귀어보자고 다짐해도, 3월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도 글렀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람을 대하는 일에 미숙한 게 조금 불편하기는 했어도 그렇게 큰 문제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 아이가 쓴 독후감을 읽고 나서 나는 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같은 반 아이가 쓴 독후감에는 그 아이의 생각과 감정 등이 담겨있었다. 나는 독후감을 쓰면 대부분은 책을 요약하는 데에 할애했다. 나의 감상이나 느낀 점은 맨 마지막에, 기껏해야 한두 줄 정도를 적었다. 내가 쓴 독후감에는 내가 없었다. 이제껏 나는 독후감을 잘못 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같은 반 아이가 쓴 독후감에서 나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어딘지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그 아이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다들 자기의 감정과 생각이 있었다. 문제는, 나는 내 감정과 생각을 잘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노력을 했다. 심리학책을 읽고 나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지 못한 채로 자라났는데, 그제야 나의 자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나를 이해하는 노력을 한다고 해서 학교 공부를 놓을 수도 없었다. 대학 입시라는 큰 관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풀리지 않는 자신에 대한 의문을 마음에 품고, 바쁜 고등학교 일정을 소화하느라 삐그덕거렸다.


드디어 입시가 끝나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나의 최대 관심사는 나 자신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애라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자, 혼란은 배가 되었다. 내가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친구로도 지내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에 덥석 고백을 받아들이고 나니, 갑작스러운 관계의 변화가 막막했다. 게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이성 관계에 큰 관심이 없던 나였다. 나는 아직 스스로 정의하지 못한 새로운 관계에서 혼란스러웠다.


반면에 그 아이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아이의 마음은 나보다 훨씬 앞서있었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도 했다. 도대체 나도 모르는 나를 얼마나 잘 알기에 결혼하고 싶다고 하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처음 연애하는 상대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나랑 맞는 사람을 찾아보고 싶었다. 호응할 수 없는 확신은 내 마음에 짐을 안겼다. 그래서 그렇게나 나를 좋아해 주는 그 아이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그 아이는 연애에 로망이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특히 각종 기념일을 챙기고 싶어 했다. 그 아이는 3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만나자고 했다. 나에게는 과제를 하는 일이 기념일보다 우선이었다. 그 아이는 ‘오지 말란다고 진짜 안가냐’는 친구들의 부추김에 용기를 얻어 페레로 로쉐 초콜릿을 사 들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내 의사를 존중하지 않은 그 아이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자고 했다. 나는 과제를 할 테니, 너는 네 할 일을 하라고 했다. 그 아이는 도서관에서 나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의 편지를 썼다. 나는 나대로 지독했고,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순수했다.


이토록 삐그덕거리든 관계가 나는 참 어려웠다. 수학처럼 모든 문제가 명쾌하면 좋았겠지만, 연인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친구 관계에서 서로 가까워지는 만큼 가깝게 지내면 되었지만, 연인 관계는 달랐다. 서로 기대하는 바가 있었고, 서로 다른 기대를 조율해야 했다. 그 아이에게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나를 좋아하는 마음에 기꺼이 조율하고자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대학에 가서 해방을 만끽하던 그 아이와 그렇지 않았던 나 사이에는 여러모로 입장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나는 그 아이에게 잠시 시간을 갖자고 했다. 나는 여러모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과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는 일, 거기에 학벌에서 오는 열등감까지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잠시 시간을 갖자는 나를 그 아이는 붙잡았다. 그 아이가 내게 위로를 주고 의지가 되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 아이와의 관계는 어려움을 동반했다. 그 아이의 조급함에 나는 더더욱 이 관계를 끝맺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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